단 한 번의 사랑(3)

[100만 번 산 고양이] 인문적 읽기 / 아이의 정신, 우발성의 테제

by 김요섭



아이의 정신


고양이는 백만 년 동안의 삶을 부정했지만 그것에 기대고 있습니다. 현재를 살고 있지만 여전히 과거의 존재이지요. 백만 년의 원한을 품은 채로 말입니다. 자신의 원한 감정을 잊을 수 없다면 그는 결코 아이가 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도 아름다움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지요.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 최초의 운동, 거룩한 긍정이다.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자의 정신을 넘어선 존재는 자신이 부정한 과거도 잊게 됩니다. 안티 테제로서의 원한 감정에 기대던 서사를 잊고 새롭게 변신하는 것이지요.

니체가 말하는 '망각', '새로운 시작',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 '최초의 운동'이 이를 의미합니다. 원한 감정을 '망각'하고 '새롭게 시작'하면, '스스로 힘'에 의해 살아가는 '최초의 인생'이 아닐까요?

그럼 어떻게 가능했는지 세부를 들여다볼까요?



우발성과 필연성


정신의 변화단계를 거쳤다고 하지만 고양이의 일상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먹고, 자고, 관계를 맺는 일은 백 만년 동안 반복된 일입니다. 하지만 '차이 없는 반복' 과정에 발생한 우발적 사건을 그는 놓치지 않고 집중하면서 변신합니다. 겉만 보면 그는 동일한 일상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엄청난 변화를 이뤄내지요.


우선 사자의 정신으로 변화를 복기해봅시다. 길에서 태어난 고양이는 다시 편한 삶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좋아해 주는 인간에게 얼마든지 몸을 의탁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그는 이를 거부합니다. 한 마리의 늑대처럼 광야의 삶을 선택합니다. '길에서 태어남'이라는 우발적 사건에 집중하고 결국 내적 변화를 일궈냅니다.


고양이는 비로소 '자신을 사랑할 줄 알게' 되었지요. 그는 '모든 이의 사랑을 받았지만 누구도 사랑하지 못한 삶'을 산 것 만이 아닙니다. 다른 어떤 이도 사랑할 수 없는 존재는 결코 자신을 사랑할 수 없지요. 사랑 없는 백 만년의 삶은 자기혐오를 넘어 무감각이라는 비극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는 문장은 그가 '물화'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돌처럼 딱딱해져 버린 것이지요.


하지만 그가 길고양이로 태어난 우발적 사건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집중을 통해 필연적 변화를 가져온 것이지요. 자기혐오와 무감각을 벗어난 '자기애'는 얼마나 큰 변화인가요? 나르시시즘은 사자의 정신의 미덕이며 아이가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하지만 이전 화에도 언급했듯이 사자의 정신은 불완전합니다.

사자가 된 고양이에게 다시 한번 우발적 사건이 찾아옵니다.



나르시시즘에서 목숨을 건 도약


그는 우발적으로 나타난 흰 고양이에게 용기를 내어 접근합니다.

단 한 번도 암고양이의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던 그는 변하기 시작하지요.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던 고양이가 자신만의 거울이던 호수를 벗어나기로 결심합니다.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백 만년 만에 겨우 찾았다고 생각한 자기 존재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중대한 일입니다. 현존재의 근원이 되는 공간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목숨을 건 도약'(니체)이지요.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물론 그가 '자기애의 호수'에 계속 있었다면 어떤 비참한 일이 발생했을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의 '나르키소스'처럼 자기 모습에 취해 물속으로 뛰어들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자의 정신을 획득했지만 아이로 변화하지 못하고 결국 나르시시즘적 죽음을 반복했겠지요. 차이 없는 죽음이 다시 반복되었다면 그는 자기혐오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백 만년의 고통 속에서 겨우 발견한 자기 자신인데, '나르시시즘'이 오히려 자신을 죽인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이 부분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니체의 문장을 좀 풀어서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줄을 타고 있다고 생각해보시면 이해하기 쉬울 텐데요.


허공에 떠있는 줄 위를 두 발로 걸으며, 반대편으로 건너는 과정에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낙타로 출발한 사람이 긴 줄을 타는데 목적지는 반대편 끝에 있습니다. 하지만 줄의 중간에 사자의 단계가 있는데, 중간 기착지처럼 여전히 허공 위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목적지인 '아이'로 가지 않고 '사자'에 단계에 만족하시겠어요? 여기서 멈춰버린다면 허공의 위태로운 줄에 방치되는 것이나 다르지 않겠습니까? 줄을 건너려는 자는 '위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홀로 줄에서 고군분투하는

어쩌면 절체절명의 순간

흰 고양이가 그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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