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가면서 감추는, 언어

시라노(Cyrano, 2021), 조 라이트 감독, 영화 읽기

by 김요섭



비어 있는 것


언어는 물러나 있다. 록산을 향한 끝없는 다가감은 드러나있으나, 동시에 항상 감추어져 있다. 그녀의 시선 앞에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 비존재로 '시라노'는 벽 뒤에 숨어서 지켜볼 뿐이다. 누구보다 탁월한 시적 언어와 파토스적 힘을 가진 내면과 달리, 키 작은 난쟁이인 그의 외모는 볼품없다.


9.jpg


자신의 영혼이자 전부인 '언어'의 아름다움과 달리, 매끄럽지 못한 외양은 그를 비어있는 장소로 밀어낸다. 존재자와 존재의 불일치는 항상 자신으로부터 미끄러지게 하며,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다.

영화 초반 극장 씬에서도 드러나듯, 당당하고 화려한 언어가 무대 전체로 울려 퍼질 때, 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말할 뿐이다.


3.jpg



드러내는 것


록산이 첫눈에 반한 아름다움은 매끄러움이다. 극장에서 크리스티앙과 눈을 마주친 찰나의 순간, 그녀는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자신의 상상 속의 이미지와 결합한 그는 다비드의 육체와 아르킬로코스의 시적 언어를 가진 완벽한 존재다. 그녀는 오랜 친구인 근위대장 시라노에게 신입으로 들어온 그를 잘 돌봐주고, 자신에게 편지를 쓰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4.jpg


록산의 부탁은 그를 찢는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는 양가감정은, 갓 입대한 크리스티앙과 이야기를 나누며 동일하게 느낀다. 시라노는 그의 궁핍한 언어와 거친 직선성이, 결코 그녀의 사랑에 닿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언어로 록산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 역시 그의 매끄러움을 빌리는 것임을 알게 된다.


물론 이는 위험한 모험일 수밖에 없다. 크리스티앙의 외양에 부재해있는 시적 언어를 대리 보충하는 결과록산을 잃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라노는 불가해한 모순을 모두 떠안기로 한다. 그녀를 위해, 간청한 바를 그대로 수행하는 것이다. 동시에 다가갈수록 미끄러지는 에로스를 향해, 극단까지 나아가는 언어적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자신과의 분리와 에로스로부터 배제되는 고통을 홀로 감내하는 것이다.


6.jpg



에로스의 조건


여러 번의 편지가 오고 가는 과정에 그들의 에로스적 상상력은 폭발한다. 과잉된 크리스티앙은 성급하게 자신을 드러내고자 한다. 그의 언어가 결코 자신의 것이 아님에도, 시라노의 메모도 거절하며, 록산 앞에 서고 만다.


그의 거친 자만심은, 결국 에로스의 불능으로 이끈다. '사랑해'라고 반복되는 언어에, 그녀는 '단순한 것이 진실을 말하기도 하죠'라고 말하다가, 결국 계속되는 '정말 사랑해'에 질리고 만다. 다성적 언어를 가진 록산은 결코 단선적이며 거친 말로 포획되지 않는 것이다.


2.jpg


매끄러움만으로는 그녀를 매혹시킬 수 없는 것을 모르는 것은 크리스티앙이다. 그녀는 그런 그를 밀쳐내며 '조금 더, 조금 더' 말해달라고 외칠뿐이다.


이는 짐승성으로 환원되려는 에로스를 구원하는 신성의 언어를 요청하는 일이다. 다가갈 수 없는 것에 다가가는 관능이 빠져있는 것을 그녀는 결코 묵과할 수 없다. 시라노의 물러남처럼, 서두르지 않으며 매혹적인 언어로 어루만지는 일 없이, 에로스는 불가능한 것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일리아(il y a)와의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