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 서커스단에서는 그가 무슨 짓을 했든 묻지 않는다. 도시의 외곽을 전전하며 낯설고, 기이한 모습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이들에게, 기괴하거나 불가해함은 오히려 유능함의 원천이다. 이는 감독의 이야기 구조의 중심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기예르모의 필모그래피는 '기이함'과의 관계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부정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끔찍한 것, 금기시된 욕망,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의 드러남이 그의 미장센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부정성을 그의 서사의 전면에 가져다 놓으며, 관객의 관성과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는 낯섦과 부정성은 절대적으로 타자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의 무의식 어딘가 잠재되어 있는 '카인의 후예'로서 타나토스, 도저히 정면을 주시할 수 없는 비존재의 얼굴, 극단적 에로티시즘은 타아적인 것이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악은 특별한 악인에게만 있는 초재적인 것이 아니라, 평범성으로 도처에 편재하는 것이다.
다만, 일리아(il y a)적인 비인칭적 있음은 '성과 주체'의 바쁨으로는 도저히 감각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의 보여주기 방식이 낯설게 여겨질 뿐이다. 기예르모가 보여주는 끔찍하고 기괴한 이미지는 실은 우리의 심연이자, 계속 감추려는 내면의 조각들인 것이다.
심연의 파편들
감독이 심연 속 기괴함으로, 영화에서 첫 번째로 전시하는 것은 '기인'이다. 클렘(윌렘 데포)은 부랑자나 알코올 중독자를 아편을 탄 술로 중독시킨다. 한 인간의 인격을 철저히 파괴하며 인간도, 괴수도 아닌 괴이한 모습으로 전락시키는 그는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 작은 악마의 현현이다.
또한 그는 '출산 중에 사산한 태아'와 같이 사연이 있는 시체를 유리병에 담아서 전시하기도 한다. 그중 가장 아낀다는 '에녹'은 유산 과정에서 그의 어미를 죽게 만든 태아로서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다.
클렘이 붙인 이름 '에녹'은, 성경에서 첫 번째 살인자로 나오는 카인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은유적이다. 이는 영화 후반부에 스탠턴이 나락으로 떨어진 뒤, 다시 돌아온 유랑 서커스단에서 반복되는 시퀀스이기도 하다.
오이디푸스의 여정
친족 살해의 상징인 '에녹'은 스탠턴(브레들리 쿠퍼) 자신이기도 하다. 그의 기이한 행각은 오이디푸스의 여정과 다르지 않다. 성공한 듯 보이는 삶은 가까운 사람을 속이고, 짓밟으며, 피를 보게 만들 뿐이다. 그의 극단까지 이르는 여행에서 살해당한 이는 한 둘이 아니다. 자신의 친부, 심령술을 가르쳐 준 아버지 같은 존재인 피트, 부모 뻘인 판사 부부, 마지막 에즈라와 그의 부하까지.
그의 무자비한 성공은 도리어 자신의 목을 조여 온다. 결국 쫓기게 된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처참한 몰골로 영화의 첫 시작점으로 돌아온다. '오이디푸스'의 이야기가 변주된 그의 서사는, 실은 우리의 여정과 다르지 않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은 '우리는 무의식적 살해자이며, 욕망의 부정성을 안고 사는 위선자이며, 카인의 후예'라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남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인격을 전면에 내세우며 그러한 부정성은 모두 없는 것처럼 치부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기예르모 감독의 미장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늘하게 있는 '거기'를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모두 보기를 원하지 않는 '그곳'을...
한편, 클렘의 대사 중에 주목해야 할 지점은 '관객들이 기인을 보며 위안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가장 최악의 상태에 빠진 인간을 보며, 자신은 그 정도는 아니라는 안도감. 이 말인성은 프로이트가 자신의 후기 환자들에서 발견한 위선이자, 자기기만이기도 한 것이다.
영화 속 기인을 바라보는 '악한 사마리아인'의 놀란 얼굴이 우리의 얼굴과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일 뿐이다.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은 그들 속 '그곳'을 지시하고 있으나, 거기를 들여다보기를 원하지 않으며,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다. 자신 속 사랑받지 못한 '타아'는 영화에서처럼 쇠창살에 감금된 채, '이건 내가 아니야'라고 읊조리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클렘'이라는 인물은, 감독의 또 다른 페르소나이자, 내면 속 진실이다. 그는 영화 속 캐릭터와 이미지로서의 '기인'을 사육하며, 전시한다. 그의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기인'들은 실은 '타아'로서 우리 자신이며, 마주해야 할 타자성이다. 부정성의 현현으로 진실이자, 계속 물러나 있는 '에녹'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