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성의 언어, 타자성의 시선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 존 버거 읽기(1)

by 김요섭



주체성의 언어, 타자성의 시선


'말 이전에 보는 행위가 있다. 아이들은 말을 배우기에 앞서 사물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9p


주체성은 거주하고 정주함으로써 자기 동일성의 관성을 가진다. '보는 행위' 역시 이러한 전체성의 환원을 벗어날 수 없음에도, 저자는 '바라봄'을 타자성의 관점에서 풀어내고 있다. 그가 이러한 사유를 전개하는 까닭은 '제도화된 강단 미술사학의 암묵적 전제'를 반대하기 위한 의도가 있기에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기존 미학의 고착된 접근을 반대하고, '다른 방식으로 보기' 위해, '말'의 위치에 제도화된 언어를 두고, '보는 행위'를 그것보다 앞선 것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카데믹한 언어를 해체시키기 위해 쓴 그의 첫 문장이 이해가 되면서도, 이상하게 잘 넘어가지 않는다. 과연 보는 것이 말보다 먼저라고 할 수 있을까? 정말 아이들이 말을 배우기 전에 사물을 보는 것일까? 타자의 언어이자 목소리는 아이가 다 이해하지 못한 채로 주체성 속으로 스며들지 않은가? 아이는 분명 눈으로 보기 이전에 말을 배우고 있으며, 이는 주체성보다 타자성이 앞선다는 레비나스의 사유와도 맞닿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타자성을 주체성 앞에 내세울 수 있는 미학만이, 유한성 너머 멀리서 오는 이의 도래를 환대할 수 있다고 믿기에. 그의 문장이 어떤 의도에서 그렇게 써졌는지 알면서도 잘 넘어가지지 않는 것 같다.



'시선은 죽이고 노래는 살린다' - 모리스 블랑쇼


물론 그가 비판하고자 하는 '말'이 제도적 권위를 입은 언어라는 점으로 한정한다면 납득할 수 있다. 이렇게 보아야 한다라는 언어적 틀이 없는 시선은 '판단 중지' 속에서 새로운 관점을 생성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보는 행위' 역시 동일성으로 쉽게 환원되며 또 다른 관성을 만들어내는 주체성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걸리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저자 역시 '시각'이 주체의 '선택적 행위'라는 점(11P)을 인정하기도 하고, 세계 내 존재의 '거기 있음'이 또 다른 타자의 시선과 결합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짚어내지 않는 것도 아니다. 바라보는 행위는 타자의 시선과 함께할 수밖에 없음을. 주체성 너머에서 생성되는 '우리'라는 어떤 보편의 가능성에서 '바라봄'은 단순히 동일자의 시각으로 환원되지 않을 수 있다는 관점이 슬쩍 엿보이는 점에서 그의 다음 이야기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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