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주의 없는 가족의 가능성

브로커(Broker 2022),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송강호

by 김요섭


차이 없는 반복?


영화는 더 이상 새롭지 않았다. 히로카즈 감독이 자신의 작품을 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칸에서 받은 상(2022)은 기존의 명성에 기반한 것이 아닌지 의문이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꽤 시간이 흘렀으나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일지 모르겠다. 물론 이는 영화를 보는 필자의 편협함이나 고약한 완고함 때문일지 모른다.


common 2.jpg


어쨌든 작품의 힘이 떨어지고 있는 것은 확연해 보인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어느 가족(2018)'에서 보여주었던, 주된 테마를 차이 있게 반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넘어서고자 하는 '파편화된 인간, 어떤 차이도 모색할 수 없는 인간'은 오직 타자를 환대하는 가운데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계산하고, 파악당하며, 사라져 버리는 이들에게 단 하나의 가능성은 '혈연을 넘어선 가족'이자, 그가 영화에서 계속 반복해 마지않는 '가족주의 없는 공동체'가 아닐까.



무위의 공동체


장 뤽 낭시는 이를 '무위의 공동체', 모리스 블랑쇼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라고 했다. 그렇게 고착됨 없이 사랑하는. 낯선 이를 향해 열린, 항상 새로운 관계만이 희망 없는 희망이다. 오직 그러한 가능성이 각자의 단독성에 공명하며, 동시에 지배 없는 전체로 하나가 되는 순간을 생성할 수 있지 않을까? 감독의 작품에서의 '불가능의 가능성'은 그러한 헤테로토피아를 꿈꾸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9.jpg


하지만 이번 작품의 문제점은 그러한 공동체가 장소(한국)를 달리 했을 뿐,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계획된 서사의 공간은 아무리 '걸어도, 걸어도' 주체의 인식으로 금방 환원되고 만다. 완전히 다른, 끝까지 해석되지 않는 타자성을 상실한 작품을 경이롭다거나 아름답다 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오래 묵은 것의 단단함과 충실함의 미덕이 있을지는 몰라도. 울타리를 공유하지 않는 관계, 절대적 타자성의 여분과 같은 전적인 새로움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감독은 자신이 지향하고 있는 공동체가 갖춰야 할 새로움을, '다시 한번' 획득하는데 실패한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1.jpg


송강호 역시 다르지 않았다.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나 과연 이전과 비교했을 때 그의 연기는 대단했던가. 오히려 지금까지 필모그래피의 연장선에서 공로상의 성격으로 수여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특별하지 않았다.


7.jpg


마무리하자면, 날 선 비판은 한동안 동경했던 감독에 대한 아쉬움이자, 그의 노쇠함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해주길 부탁드린다. 물론 그가 헤밍웨이처럼 눈빛이 흐려지지 않은 노인으로 갱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번처럼 무난한 작품은 느닷없는 아름다움과는 계속해서 멀어지고 만다. 그것은 완성의 순간 사라지지 못하며, 안전한 장소를 서둘러 찾은 뒤 고착될 뿐이다. 안타깝지만 '결코 이해될 수 없음'이 없는, 아름다움은 어불성설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본래적 실존을 향한 해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