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변호사 우영우(2022), 유인식 연출, 문지원 극본
타협된 가능성, 우영우
그녀는 지향성 없는 돈키호테다. 고귀한 이상도 없고, 정의를 향함도 없다. 다만 순수한 선의로 사랑하며, 불가능한 꿈에 빠지는 것은 돈키호테를 닮았다. 반쪽의 기사(騎士), 그것은 성과사회에서 대중이 잃어버린 이상향이다. 타협된 가능성이며, 전적인 불가능은 아닌 순수성이기도 하다.
계산이 들어오지 않는 관계, 누군가를 순수한 마음으로 대하는 것. 이는 상징계의 질서를 벗어날 수 없는 이에게는 불가능일 뿐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판단하며, 타인을 대상화시킨다. 주체의 명증적 인식으로 이해된 낯섦은 더 이상 신비롭지 않다. 타자는 주위에 널려있는 듯 보이지만 주체의 적당한 이해로 소비된 '부정성'은 벌써 추방되고 말았다.
성과주체의 매끄러움
표면적 이해는 성과주체의 매끄러운 피부를 닮았다. 지배하는 전체성은 부정성을 없는 것처럼 치부한 결과, 세련되고 교환되기 좋은 신체성을 획득했다. 그러나 과잉된 긍정성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체제의 아비투스를 자신의 것인 양 받아들이기에 자신의 욕망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시스템의 부분으로 살아가는 존재는 가장 일반적일 수밖에 없다. 진정한 자기를 획득하기 위해서 사자(니체)가 되어야 하지만 그는 결코 절벽에 매달리지 못한다. 본래적 실존이 부재한 존재에게 진정한 이해의 순간은 도래하지 않으며, 나아갈 방법을 알지 못하는 얕음(비트겐슈타인)'은 전적인 타자성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울타리 바깥은 꿈도 꿀 수 없는 그는 단지 무리 속에 있는 온순한 양일뿐이다.
라만차의 기사, '이상'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할지 모른다. '이상(異常)'을 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라만차의 기사가 품은 '이상(理想)'처럼 낯섦, 비밀, 신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어쩌면 우영우에게 도래한 '자폐'는 단순히 부정적으로 치부하고 말 '이상(異常)'함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재앙의 아름다움이며, 전적인 타자성의 도래이다. 다 이해하지 못한 채로 받들지 않으면 안 되는 불가능이기도 할 것이다.
오직 부정성을 품는 존재만이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타자를 자신의 앞에 내세우는 주체만이 아름다움의 구원을 단속적(斷續的)으로 지속할 수 있다. 이는 상징계 속에서는 '광기'이자 '이상(異常)'함으로 치부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품을 때, 그는 나아갈 방법을 알게 되며, 동시에 새로운 이해를 획득하게 된다. 이는 주체성의 요구가 아닌 타자성으로 시작되는 근원적 가능성이다. 오직 그 순간, 그는 이해됨 없이 이해되는 아름다움에 머무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