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비어있거나 빠져있다. 체제의 질서, 비언어적 소통, 관행적 상투어에 무심하며, 전혀 상관없는 듯 행동할 뿐이다. 전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이루어지는 말과 행동은 상징계 속에서는 부적절한 생존전략이며, 자기 파괴적 행태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철저한 자기 중심성이 오히려 시스템의 아비투스를 이길 수 있는 무기가 된다. 그녀의 상시적 '파르헤지아'는 항상 체제의 경계를 넘나들며 울타리 속 타자를 찔러댄다. 그것은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것처럼 어떤 의지나 지향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반쪽의 돈키호테라고 언급했던 이전 글(https://brunch.co.kr/@baccalaureat/248)의 관점을 비틀어본다면, 그것마저 비어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초재성 없음, 편재된 일상성이자 바깥으로서 '자폐'
실재계로 열린 주체
그녀는 실재계를 말하는 무녀(巫女)다. 상징계 속에 있음에도 자신의 비어있음 덕분에, 그녀는 계시받은 단독자가 된다. 체제적 고정관념, 선입견의 침입은 그녀의 지독한 루틴과 맞부딪혀 상쇄될 뿐이다. 주체에게 절대적 타자성과 같은 '자폐'가 부여한 불가능으로 인해 그녀는 이곳이자 저곳에 동시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재앙의 아름다움은 시스템의 관성을 이긴다. 그녀는 상징계 속을 걷지만 실재계 속에 있으며, 피안(彼岸)의 세계를 살아가나 너무도 차안(此岸)에 있다. 단 하나의 단독자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가능성을 품은 존재. 이는 '자폐'라는 텅 빈 주체성이 준 선물이자 재앙이다.
전적인 타자성 덕분에, 그녀는 자신이 맞닥뜨리는 모든 사건에서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순수하다 못해 체제 내의 생존에 철저히 무심한 행태는, 오직 자폐라는 계시적 사건만이 가능하게 한다. 이는 텅 빈 주체성이자, '바깥'의 가능성인 것이다.
물론 자폐의 성향으로 자신만의 루틴, 편견, 선입견이 존재함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체제가 부여한 것이 아니며, 전적으로 '타자성'인 바깥으로부터 도래한 사건에서 비롯된 내적 모순일 뿐이다.
자폐의 신비가 완전히 파악 불가능하듯 그녀 역시 자신 속의 불가능과 그러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녀를 사랑하는 이들 역시 완전히 낯선 것과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직 그러한 주체성이자, 불가해한 타자라는 '복수(複數)성'만이. 체제 속에 있으나, 동시에 바깥에 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