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레비나스와의 대화(2022), 프랑수아 푸아리에 / 레비나스 읽기(3)

by 김요섭



유책성의 시차, 책임적 주체


역사에 의해 훼손된, 조롱된, 살해된 주체의 지위는 무엇인가? 인류가 저버렸던 인간의 지위는 무엇인가?


비인격적인 존재 밖에서 주체를 떼어놓음, 존재론적 질서의 단절은 아마도 그곳에서 사라진 자들의 기억 속에 태어난 역사적 질서의 단절과 대응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타인을 위한 책임적인 강렬한 주체성의 표명이며 "더 낮은 존재가 아닌 하지만 주체의 방식"인 의식의 표명이다. 이것은 단절의 힘이고, 중성적이고 비인격적인 원칙의 거부, 헤겔적인 전체성의 거부 그리고 정치의 거부이다....


이것은 말해진 말의 뒤편에서 사회학이 창시되지 않는 또는 참조의 체계 내에서 이 말의 자리를 찾는 그리고 원하지 않았던 것에 말을 돌리는 심리학이 창시되지 않는 말하기의 힘이고 말의 자유이다. 그러니까 비인격적 판결을 기다리는 대신에 역사를 판단하는 힘이다." 「어려운 자유」


역사를 판단하는 이 힘은 ~에 대한 힘이 아니라 ~를 위한 힘, 더 많은 책무, 책임이다. 사회학도 심리학도 없는 말의 자유, 즉 보호의 틀 없는 "어려운" 자유, 이 자유가 우리를 강조하고자 하는 두 번째 지점으로 이끈다.


미셸 푸코는 "인간은 앎 가운데서 태어난다"라고 주장했다. 레비나스는 "주체는 타자를 위해 있다. 주체의 존재는 타자를 위해 떠나간다. 주체의 존재는 의미화 속에서 죽어간다"라고 쓴다. 여기서 인간학과 구조주의 사상가들의 객관주의에 의해 실행된 주체의 해체와 책임적 주체의 -하지만 타인을-위한-책임적 주체 그리고 그의 지상권을 잃은 주체, 우리는 여기로 되돌아갈 것이다.

(19~20p)




1.

'주체의 의미화'는 타자를 향함 속에 있다. 이는 '역사에 의해 훼손된, 조롱된, 살해된 주체의 지위'를 다르게 시작하기 위한 형식이다. 그가 책임적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지상권을 잃어야'만 한다. 거주하고 정주하면서 만들어낸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면, 타인을-위한-주체일 수 없다. '어려운 자유'를 온전히 떠안기 위해 그는 짐을 가득 실은 낙타가 되는 것이다.



2.

'우리는 전원이 모든 것에 대해, 서로에 대해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른 누구보다도 죄가 깊습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1절>'


'~에 대한 힘'과 '~를 위한 힘'의 차이는 유책성에 있다. 책임적 주체가 되지 못한 존재는 위의 첫 문장에서 두 번째 문장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전체성은 각자의 죄를 객관적으로 따지며 '서로에 대해' 심문하고, 고발할 뿐이다. 그러나 두 번째 문장으로 넘어선 주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책성을 인수한다. 레비나스는 이를 '단절의 힘이고, 중성적이고 비인격적인 원칙의 거부, 헤겔적인 전체성의 거부'라 말한다.



3.

먼저 '단절의 힘'은 자신을 지키는 것밖에 모르는 주체를 끊어내는 결단이다. 이는 정주하며 만들어 간 강고한 자기 동일성의 해체를 온전히 감내하는 일이다. 전쟁하는 전체성을 무화시키며 오직 타자를 향해, '괴로움을 겪는 일'이다.


'중성적이고 비인격적인 원칙의 거부'는 상대주의와 자유주의의 거부이다. 너와 나는 다르니깐 서로를 인정하자는 말, 타자의 고통을 공감하되 거리두기를 통해 소비하는 자유주의. 그곳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라는 가능성이 부재한다.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신성, 정의, 아름다움은 결코 계산된 중립에 도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헤겔적 전체성의 거부'는 오직 하나의 전체가 되기 위한 역설이다. 그는 타자성을 파괴하고 흡수하는 주체성을 거부한다. 단지 해체하는 지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환대하기 위한 괴로움을 감내할 뿐이다.

낯선 에로스의 시작, 이는 고통 속에 있는 책임적 주체만이 가능한 거부이자 수락이다. 동시에 그는 농(non)이라고 말하며, 위(oui)라고 말하는 '반항하는 인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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