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무」의 한 대목 "자유와 책임"에서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쓴다. "자유롭도록 선고된 인간은 그의 어깨 위에 전 세계의 짐을 진다. 인간은 존재의 방식으로서 세계와 자기-자신에 대해 책임이 있다."
마찬가지로 레비나스에게 책임은 강요이고 절대이다. 그러나 두 철학자들 사이의-결정적인-견해차가 여기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레비나스는 자유 이전에 그리고 타자를 위해 책임을 생각한다. 그리고 레비나스는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 또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이 있는 주체를 표명하기까지 나아간다. 책임은 어떠한 결정, 어떠한 선택에서도 발생하지 않는다. 책임은 근본적인 수동성이며, "괴로움을 겪음"이다.
이 점에서 레비나스는 어려운, 아니면 듣기 불가능한 문장들을 가진다. 만일 우리가 전능한 선택의 자유라는 사르트르적인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만일 우리가 유명한 그의 악명 높은 "지옥, 이것은 타자들이다"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타자의 잘못에 의해 고통을 겪음에서 타자들의 잘못을 위한 고통을 겪음이 움튼다.' 또는 '타인에 의해 겪음은 '타인에 의해서'가 이미 '타인을 위해서'인 경우에만 절대적인 인내이다. 이러한 전이는 주체성 자체이다.'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 너머」
주체의 탄생. 그러나 타자에게 복종하는 사람으로서 주체의 탄생. 면직된, 허약한 주체의 탄생. 타인에게 바쳐진('바쳐진 그러나 바치지 않는') 약함의 탄생.
1.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은 '약함'이 빠져있다. 비록 적극적 참여가 타자를 위함이라 할지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는 여전히 '자유'로울 뿐("지옥, 이것은 타자들이다")이다.
주체의 자유 속에서 타자성은 최대한 허용되나, 극단적 사랑에는 가닿지 못한다. 그는 수많은 타인 자를 만나고 있으나, 결코 타자를 만날 수 없다. 그의 높음은 타인의 낮음을 측은하게 바라보며, 개선하려 하나, 결코 함께 낮아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깊음과 얕음, 높음과 낮음의 변용이 없는 관계는 고착될 뿐이다. 협애한 유한성은 바깥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며, 결국 소비된다.
2.
레비나스적 '약함'은 허약하다. 그는 인내하고, 복종하며, 괴로움을 겪는다. 그러나, 낮음의 온유로 인해 타자성은 비로소 주체의 심연까지 날아와 앉을 수 있다. 약함은 이제 '복수적 단수'로 변용된다. 새로운 주체는 함께 낮아짐을 통해 사르트르의 문장("지옥, 이것은 타자들이다")을 이렇게 바꾼다.
"지옥,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를 향함이다"
그의 책임은 사르트르처럼 자신이 '선택하는 능동성'이 아니다. 그의 유책성은 오직 면직(免職)됨으로 인해 시작된다. 이는 신의 계시를 받은 존재처럼 선택된 수동성이며, 그분에게 바쳐진('바쳐진 그러나 바치지 않는') 약함인 것이다.
함께 낮아진 것은, 오직 변용을 통해 저 무한을 향할 수 있다. 타자는 지옥이나 오직 그곳을 벗어날 가능성 역시 타자와 함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