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음과 낮음의 헤테로토피아

「레비나스와의 대화」 프랑수아 푸아리에 / 레비나스 읽기(6)

by 김요섭



타자를 위한 신호


"항상 자아의 저-편 또는 바깥에 있는 것." 어떤 운동이 우리에게 타인의 붙잡을 수 없는 가까움을 언어보다 잘 예측하게 할 수 있는가? 대화 안에서, 타인은 드러남 없이-언어는 드러내는 만큼 은폐한다. 아니면 드러내지 않은 것 이상으로 은폐한다-타자로서 그의 현전을 표명한다. 타자는 내게 그의 환원할 수 없는 자리로부터 나의 자리로, 멀리서 그러나 아주 가까이서 내게 말할 수 있게, 나를 들을 수 있게, 내게 응답할 수 있게 거기에 있다고 말한다.


대화의 역설 : 내가 타인에 가까이한다고 믿는 순간 그는 나를 벗어난다. 말하는 자로의 나와 간청을 받는 자로서의 나는 서로 낯설게 있다. 만남은 결합이 아니라 두 이야기의-간격 안에서-서로 뒤섞이고 서로 멀리하는 접근이다. 둘 사이의-말


"이것은 명백히 네가 절대적으로 나와 다르고, 서로의 대화가 있기 때문이다.... 앎으로서의 사유가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는 세계 내부에서, 지각과 이해가 주어진 것을 파악하고 제 것으로 삼고 그것에 대해 만족하는 세계 내부에서 수립되는 모든 관계들의 상이한 관계." 「이념에서 오는 신에 대해」


대화 속에서 나는 타자를 위한 신호가 된다. 나는, 거듭 나의 최고 권력으로부터 면직되고 거듭 타인을 위해 쉼 없이 타자에 응답하는 그리고 타자에 대해 책임지는 의무 안에서 부름 받는다.

실제로 결코 타자에 도달하지는 못하지만 절대적으로 타자와 가까이하려는 의지로서, 언어는 욕망의 형태일 것이다. 내가 욕망할 수 있음에 따라 존재하지 않는 것, 또는 문자 그대로 몸을 갖지 않는 것, 소유와 앎을 용납하지 않는 것, 낯선 이, 미지의 사람, 내 가까이서 내게 모습을 나타내는 자를 나는 명명할 수 있다.

(25~26p)




1.

'신호'는 부재의 현전이다. 그녀는 무한한 대화 속에서 타자가 타자인 채로 나타나기 위한 열림이 된다. 신호 혹은 상징, 그것은 신성의 아름다움의 통로이며, 진리의 바깥을 향해 활짝 열린 창이다.


부재하는, 그러나 부재할 수 없는 사랑은 비로소 좁은 문으로 들어온다. 그가 한없이 낮아졌기에, 그곳으로 들어온 무한한 사랑은 그녀를 지극히 높은 곳으로 데려간다. 유한성이 무한으로, 무한성이 유한으로 끝없이 변용된다.


이미 장소를 잃어버린 그곳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헤테로토피아이다. 지극히 높음이자 낮음, 진리와 아름다움, 극단을 넘어서는 사랑은 그곳에 가득하다. 가장 낮은 곳에서 그를 올려다본다. 그녀는 아찔하면서도 너무나 평온하다. 도저히 바라볼 수 없는 곳을 향한 눈은 이미 멀어버렸으나, 광활한 신비는 너무도 확실할 뿐이다.



2.

면직된 주체, 그녀는 유책성 속의 주체이다. 품을 수 없는 것을 품고,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하는 일은 오직 부름 받은 존재의 가능성이다. 그들은 너무도 상이하고, 절대적으로 다르며, 뒤섞이면서도 멀어지는 관계이기에, 역설적이게도 그녀는 감내할 수 있다.


무한한 높낮이의 시차로 발생한 에로스는 감당할 수 없는 계시를 부어주었고, 그 안에서 머물게 한다. 헤테로토피아. 그곳의 신비를 도저히 기다릴 수 없지만, 오직 기다릴 수 있음으로 살아간다. 계속할 수 없지만 계속할 것이라는 사랑, 미래를 향해 반복하는 생명의 약동으로 응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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