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은 어떤 희생 또는 부드러운 어조의 어떤 분노에 의해 얻을 수 있는 양심(복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타인이 항상 이미 거기에 있기 때문에, 세상에 내가 도래하기 이전부터 타인을-위한-책임은 "시작보다 더 오래"_「다른 사람의 휴머니즘」된 것이다. 책임은 아득한 옛날의 과거로부터 온다. 이것은 자기 상실이자-그러나 굴복함 없는-동시에 소환이다. 나는 타인의 볼모이고, 나는 회피할 수 없다.
"선택되지 않은-볼모의 조건 : 선택이 있었다면 주체는 자기만의 태도를 고수했을 것이고 이전 삶의 결과물을 간직했을 것이다. 주체의 주체성, 마음의 현상조차 타자를 위함이고 독립성을 갖는 것조차 타자를 책임지는 데 있고-타자를 위해 속죄하는 데 있다."_「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
선출
나는 타인에게 책임을 지기 위해 선출되었다. 이 자리에서, 이 임무를 위해, 나는 유일하며 대체되지 않는다.
"유권자가 아닌 선출된 자 또는 요청된 자의 유일성, 자발성으로 전환하지 않는 수동성... 선출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에도 선출된 자!"_「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
(34~35p)
1.
세계-내-존재에 선행하는 세계는 '이미 거기에' 있다. 나는 이곳에, 아무런 목적도 시간성도 없이 던져진 실존이 아니다. 존재의 의미는 유일하며 대체될 수 없는 사건으로 내 앞에 이미 도착했다. 결코 회피할 수 없는 책임이자 매임은, 타자를 위한 소환에 응하는 것뿐이다.
이러한 요청은, 결코 내가 선택하는 '어떤 희생 또는 부드러운 어조의 말'이 아니다. 나는 이 일에 어떤 권리도 없는 무권자이며, '수동성보다 더 수동적인 수동성'안에 있을 뿐이다. 오직 그를 위해 무릎을 꿇으며, 수치를 감당하는 일에 볼모로 사로잡힌 것이다. 그것은 자기 상실의 고통이자, 타자를 향해 박해 받음이다.
2.
감당할 수 없는 자유는 '자기 상실이자, 굴복함 없는' 일의 동시성에서 시작된다. 볼모이지만, 볼모일 수 없는 아이러니는 '선출'이라는 존재 사건으로부터 기인한다.
계시받은 단독성이자 유일무이한 책임을 지는 자는, '비상함'을 위해 '나를 멈춰' 세운다. 그가 그곳을 향해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소리는 곧 '무한의 증언'이다. 이는 나의 죽음이며, 무한의 현현을 위한 최초의 열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