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타인의 접근에서 타인이 알렸던 무한을 보았다. 선함-즉, 살인하기를 중단하고 타인을 걱정하기를 강제하는 인간의 인간성-은 무한의 증언이다. 내가 타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나의 의지와 거부의 힘보다 더 센 힘에 의해 강제되고 부름 받는-것은 무한, 이미 말한 것을 앞서는 말함, 내 바깥에서 생겨나 내 안에서 명령하는 명령, 그리고 내게 타인을-위한-책임을 지라고 강제하는 명령의 증언과 계시이다.
무한의 현전 : 타인의 얼굴 안에 있는 신의 목소리.
"선은 내가 선을 바라기 전에 나를 바란다."
선출은 타인을 위해 그리고 타인에 의해 고통을 겪게 하고 자유 이전의 수동성에서, 신이 듣게 하는 선의 장소에서, 신이 이념에서 오는 장소인 타인의 자리에서 죽기까지 타인을 대신하게 한다.
대속
대속함은 영웅주의도 자부심도 없이 자신을 희생함을 뜻한다. 타자를 위해 존재하기, 실제로 존재하기. 존재론과 존재, 죽음의 범주를 넘어서는, 단절하는 가능성 또는 오히려 범주를 앞서는 가능성. 첫 번째 선함, 형제애 위에 도덕을 세우는 가능성.
"인간적인 것의 지위 자체는 형제애와 인류의 이념을 함축한다." 「전체성과 무한」
"타자를-위한-일자의 위함은 이익/존재 사건과 단절하는 전적인 무상의 위함이다. 미리 설정된 모든 체계 밖 인간적인 인류애를 위해"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
레비나스에게 "타인을 대신하기"는 헛된 말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힘 전체를 요구한다... 인간성이 무용할지라도 이 인간성을 시도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인간성만이 의미를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성은 특히 의미를 멀리하는 것, 의미를 부정하는 것에 의미를 준다. 바로 죽음에.
1.
타자를 향한 책임은 자유 이전의 자유다. 시원적 자유는 나를 벗어나 있는 자유이며, 주체를 위해 먼저 물러난 타자성이기에. 두 번째 자유는 첫 번째 자유의 보이지 않는 토대 위에 있다. 이 근원적 자유는 첫 번째 선함이며, 그는 "선은 네가 선을 바라기 전에 너를 바란다."라고 말한다. 이는 '의미를 부정하는 의미'로서 당신이 무(無)를 향해 있기를. 너의 죽음을 잊지 않기를 요구하는 일이다.
2.
복종은 가장 낮은 자의 행위가 아니다. 타자를-위함은 '이익, 존재 사건과의 단절'이기에 복종하려는 자는 전존재로 산다. '자신의 박해자에게까지 책임'을 지는 삶의 강도는 자기 안위를 생각하지 않으며, 동시에 타자를 향해 온 힘을 다할 수밖에 없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이 불가능한 일에서, 나는 비로소 무의미를 벗어난다. 얕은 일상성 속에 계속 분리되던 감각은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있지 않다. 관성적 일상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완전한 일체감, 지극히 높은 환희는 이렇게 외친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3.
본래적 실존은 결코 자신만을 위한 기획 투사로 달성되지 않는다. 죽음을 앞서 본 존재는 절대적 타자를 향한 존재로 변용되며, 무한이 현현하는 장소로 '타자의 얼굴' 안에 있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나의 의미는 부정되며, 다시 의미를 얻는다. 작은 죽음은 비로소 불가능의 가능성을 입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