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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너를 위해 죽을 것이다

「레비나스와의 대화」 프랑수아 푸아리에 / 레비나스 읽기(12)

by 김요섭



타자를-위함은 주체에게 의미를 주었다. 죽음은, 이 허술한 구성을 산산조각 낸다.

"죽음은 주체가 주인이 아닌 사건, 주체가 주체 아닌 것과 관련한 사건을 나타낸다." 「시간과 타자」


내게 죽음은 어쩔 도리 없이 '진행 중인' 전적인-접근이다. 나의 죽음은 내가 참여할 수 없을 사건이고, (시간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미래이다. 어느 날, 나는 너를 위해 죽을 것이다. 나의 죽음의 순간을 지배하는 불가능성은 나의 미래를 무너뜨린다.


"죽음, 이것은 계획을 가지는 것의 불가능성(함)이다." 「시간과 타자」

미래의 파괴, 또한 의미의 파괴.

"죽음은 자아가 자신의 존재, 자신의 운명을 갖고자 하는 모든 관심을 무분별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의 휴머니즘」


레비나스는 "최상의 통찰력, 최상의 남성성"으로 인해 죽음을 향한 존재를 사유하는 하이데거와 명백히 구별된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다. 반면 레비나스에게 나의 죽음은 죽음의 상념과는 다르다. 현실성 없는 두려움, (나의 죽음은) 현실감 없는 광적인 두려움이다. 나는 앎의 힘과 빛에서 벗어난 사유할 수 없는 것, 알 수 없는 것에 부딪친다.


그러나 만약 죽음이 '세계와 자기 자신의 지배자'가 되는 자아의 모든 오만을 헛되게 한다면, 죽음은 타인을-위한-책임을 무효화하지 못한다. 장켈레비치가 죽음을 규정한 것처럼, 나의 죽음의 비장한 광경에 '존재 위에 매달린 비-존재의 단두대 날'이 있다. 레비나스는 타인을-위한 나의 책임을 전-본래적이고 궁극적으로 더 중대한 것으로서 포개고 강제한다.


"타자를 위한 전-본래적인 책임은 존재와 맞서지 않고 결정에 앞서지 않는다. 죽음은 책임을 부조리로 돌릴 수 없다." 「다른 사람의 휴머니즘」

(39~41p)




1.

'비존재의 단두대 날' 아래 엎드린 주체. 그의 몸은 묶여있지 않으나 꼼짝도 할 수 없다. 어떤 앎으로도, 인식의 빛으로도 다가갈 수 없는 절대적 타자성 앞의 존재. 그는 '현실성 없는 두려움'으로 질려있다. 아직 그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미래를 향한 모든 시간은 여기서 중단될 뿐이다. 비명조차 지를 힘이 남아있지 않은 그는 철저히 붕괴된다.


두 동강 나버린 신체, 분수처럼 쏟아지는 선혈. 그의 머리는 희미해지는 눈을 감으며, 단두대에 잘려진 몸을 바라본다. 무엇에 의해 잘린지도 알 수 없는, 그것의 인식마저 거부당하는 존재. 납득될 수 없는 마지막은 사유될 수 없다.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에 부딪힌 주체,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된 것뿐인가.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 시간은 그를 위해 흐르지 않는다.



2.

'어느 날, 나는 너를 위해 죽을 것이다.'

각자성의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무의미로 향할 때 타자를 향한 시간은 죽음에서 빠져나온다. 절대적 타자의 나타남은 시간을 멈추며, 불가능 너머로 다시 흐르게 한다. 그것은 내가 참여할 수 없는 시간이며, 어떤 계획도 할 수 없는 시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는 바깥의 시간성이다. 타자를 향함은 또 다른 얼굴에 장소 없이 머물 수 있다. 그것은 신비이며, 결코 이해됨 없는 사랑이다. 주체의 시간을 넘는 타자는 죽음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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