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와의 대화」 프랑수아 푸아리에 / 레비나스 읽기(13)
너와 모든 타자를 향한 죽음은 문자 그대로-설령 호흡, 심장 고동, 정지의 시간에 지나지 않을지라도-나 자신에게는 죽음으로 결코 존재하지도 존재했었던 적도 없다. 죽음은 나를 두렵게 한다. 왜냐하면, 죽음은 내 안의 근본적인 타자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을까 봐 불안해하면서 참을 수 없게 된 이 두려움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자살하는 자는 착각한다. 그는 단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부정하고자 하면서 자기 안의 인간을 죽인다.
"자살자에게 죽음은 극적인 채로 남는다. 신은 항상 너무 일찍 우리를 그의 곁으로 부른다. 우리는 여기-아래/현세를 원한다." 「전체성과 무한」
인내
타자의 시간인 나의 죽음 이후 시간을 향해 살아가기를 허용하는, 계속해서 살아가기를 허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인내에 대한 그의 성찰이다. 활동/업적 안에서-아이, 책-인내를 배우기. 이것은 죽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존재할 수 있음이고,
"나 없이 존재할 시간을 위해 존재할 수 있음, 나의 시간 이후 시간을 위해 존재할" 「후설과 하이데거와 더불어 존재를 발견하면서」
"인내 안에서, 의지는 이기주의의 딱딱한 껍질에 구멍을 낸다. 그리고 아무것도 제한하지 않는 욕망과 선함으로써 요구하기 위해 의지의 중대성의 중심을 바깥으로 이동시킨다." 「전체성과 무한」
(42~43p)
1.
어쩌면 자살은 지독한 자기 보존의 욕구 일지 모른다. 나 없이 존재할 시간을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은 자기 안의 존재를 부정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실존을 부정하는 이는 사실 자기 속에 죽음을 죽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닮은 타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먼저 물러나 있는 비존재는 항상 함께 였음을 그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한다.
어느 날, 가쁜 호흡을 내쉬며 쉽게 감지 못하는 두 눈은 허공을 향해있다. 텅 빈 눈동자 사이로 심연은 그를 천천히 들여다본다.
2.
인내는 내가 없는 시간을 감당하는 의지다. 신비에 맞서 실패한 사유, 좌절된 텅 빈 주체성은 새로운 의지를 생성한다. 죽음을 닮은 그것은 동일자의 중심을 해체시킨다. 이는 살아있으나 너무도 죽어있던 존재를 환대하는 낯선 폭력이다.
걱정으로 점철된 자기 보존의 욕구는 중심을 잃으며, 중심을 찾는다. 어쩌면 작은 변화는 전체성에게는 정주성을 상실하는 중대한 일이다. 새로운 사랑은 그의 상실로 인해 비로소 시작된다. 그것은 '나 없이 존재할 시간을 위해' 존재할 수 있음이며, 자식성을 향함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