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 읽기(7)
불꽃, 날개 돋친 소요여,
오, 숨결이여, 하늘의 붉은 반영이여
너의 신비를 풀 수 있는 자
너의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리...
ㅡ 마틴 카우비쉬
Ⅰ.
하나의 불꽃 속의 세계는 살아 있는 게 아닌가? 불꽃은 하나의 생명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은 한 내밀한 존재의 가시적인 기호, 어떤 은밀한 힘의 기호가 아닌가? 그것은 하나의 기본적 형이상학에 활력을 부여하는 모든 내적 모순들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리가 하나의 단순한 현상의 중심에 사실들의 변증법들, 존재들의 변증법들을 지니고 있는데 어째서 관념들의 변증법들을 추구한단 말인가? 불꽃은 질량이 없는 존재이지만 강력한 존재이다.
은유라고? 불꽃이 현자들을 사색하게 했던 그 아득한 지식의 시대에 은유는 사유를 나타냈던 것이다.
Ⅱ.
하나의 불꽃 앞에서 우리는 세계와 정신적으로 소통한다. 고요의 시간이 진정으로 울려 위대한 고독이 진정으로 지배하게 되면, 몽상가의 마음과 불꽃의 중심에 동일한 평화가 자리 잡고, 불꽃은 자신의 형태를 간직하며, 확고한 사유처럼 수직성의 자기 운명으로 곧장 달려간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사유하면서 꿈을 꾸었고, 꿈을 꾸면서 사유했던 시대에 촛불의 불꽃은 영혼의 고요함을 재는 예민한 압력계가 될 수 있었고, 섬세한 평온, 그러니까 삶의 세부적인 것들까지 내려가 침투하는 그런 평온ㅡ평화로운 몽상의 흐름이 쫓아가는 지속에 우아한 연속성을 부여하는 그런 평온ㅡ의 척도가 될 수 있었다.
(32~34p)
1.
하나의 불꽃을 향해 턱을 괴고 앉은 몽상의 시간. 그것은 안이한 휴식의 시간이 아니다. '고요의 시간'이 울리면, 그의 꿈은 '섬세한 평온'이자 '예민한 압력계'가 된다. 존재자의 빠져있음, 걱정, 애매함은 상승하는 불꽃과 함께 사그라든다.
얕은 표면에만 머무르며 '삶의 세부적인 것'으로 내려가 보지 못했던 이는 몽상에서 깊은 일상성을 되찾는다. 가벼운 불꽃 앞의 사유가 이토록 '우아한 연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2.
촛불은 무한의 현전이다. 부재하는 바깥은 '은밀한 힘의 기호'인 불꽃 속에 머무른다. 끝없이 솟구쳐 오르며 자신을 바꾸는 가시적 형태는 동시에 불가시를 지시한다. 유한자의 인과율로 설명할 수 없는 아이러니는 진리의 존재 형식이며 아름다움의 덮개다.
지극히 높은 존재는 약하게 흔들리는 것 사이, '질량이 없는 존재'로 도래한다. '존재의 변증법'이자 어둠과 빛 너머, 장소 없는 장소. 이는 단지 문학적 은유가 아니다. 몽상하는 이에게는 확고한 사유며, 무한의 세계로 열리는 탈주인 것이다. 그 '수직성의 자기 운명으로 달려감'은 본래적 실존으로서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며, 전존재의 가능성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