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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마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 읽기(6)

by 김요섭



장면들은 매우 선명하기 때문에 밤의 꿈은 손쉽게 문학을 만들어 낸다ㅡ문학은 만들지만 결코 시는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모든 환상 문학은 작가의 아니무스가 작용하는 도식들을 밤의 꿈에서 발견한다. 정신분석학자는 바로 아니무스로 꿈의 이미지들을 연구한다. 그에게 이미지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언제나 그것과는 다른 무엇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의 심적 캐리커처인 것이다. 캐리커처 밑에 있는 진짜 존재를 발견하려고 애써야 한다.


이미지를 즐기기 위해선, 그러니까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를 좋아하기 위해선 정신분석학자는 모든 지식을 벗어나 시적인 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아니무스에서 꿈이 적으면 적을수록 아니마에서 몽상은 그만큼 많아진다. 상호 주관적인 심리에서 지성이 적으면 적을수록 내밀성의 심리에서 보다 많은 감성이 나타난다.


요컨대 몽상을 꿈꾸는 존재를 작은 불빛의 이미지의 도움을 받아, 아주 옛날부터 인간적인 이미지들의 도움을 받아 연구하는 것은 하나의 심리학적 탐구에 동질성을 보장해 준다. 밤에 켜놓은 작은 등불과 꿈을 꾸는 영혼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둘 모두에게 시간은 느리다. 꿈과 희미한 빛 속에서 동일한 인내가 유지된다. 그리하여 시간은 심화된다. 이미지들과 추억들은 서로 합류한다.


불꽃의 몽상가는 자신이 보는 것과 본 것을 결합한다. 그는 상상력과 기억의 융합을 경험한다. 그렇게 하여 그는 몽상의 모든 모험에 자신을 개방한다. 그는 위대한 몽상가들의 도움을 받아들이고, 시인들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때부터 불꽃의 몽상은 그 원리에 있어서는 매우 통일적이지만 풍부한 다양성을 띠게 된다.

(21~23p)




1.

밤에 꾸는 꿈의 선명성, 명료한 윤곽은 포획된 이미지이며 문학의 손쉬운 수단이다. 그의 의지는 아니마(anima)를 억압하며 꿈의 영토를 확장해간다. 무엇보다 연약하고 부드러운 촛불은 꺼질 듯 말 듯 약해져 간다. 사라진 몽상, 은밀한 감정이자 존재론적 여성성의 흔적.



2.

몽상은 아니마의 이미지이다. 여성적이며, 수동적 이미지는 이성의 명확성으로부터 물러나 있다. 그러나 비밀은 완벽하게 지켜지지 않는다. 그녀를 주시하는 붉은 핏줄이 선 눈길은 그르렁거린다. 그는 참지 못하고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뛰어간다. 아니무스(animus)의 즉발적인 걸음은 내밀한 시(詩)이자, 신비로 감싸인 곳을 파헤친다. 성급한 손은 감추인 것을 폭력적으로 소유하려 한다. 그의 거친 손길에 아니마는 더욱 뒤로 숨을 뿐이다.



3.

그녀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인내하며 계속 내어주고, 약해지며 그의 강함을 오롯이 견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는 존재. 오직 존재론적 여성성만이 깊은 일상성으로 들어갈 수 있다. 즉발적이며 격앙된 아니무스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심연이자 내밀성.

오직 그곳에서, '이미지들과 추억은 서로 합류한다.' 연리지처럼 얽힌 형태는 아가페의 형식이다. 몽상가의 아니마로 인해, '자식성'이자 '생산성'의 시간은 시작되는 것이다.


미래를 향해 견디며, 계속하는 그녀로 인해. 오래 참음과 사랑으로 아이는 창조되었다. 내어줌의 에로스의 결실은 무엇보다 시인이며, 불꽃의 이미지를 타고난 존재다. 풍성한 다양체이며, 동시에 가장 통일적인 기이한 개방성의 형태. 그것은 몽상의 극단이며, 불가능의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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