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 읽기(5)
"자주 나는 이 아름다움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내가 그것의 비밀을 다른 삶의 영혼 속에 옮겨 놓으려면 어떻게 그것을 묘사해야 할지 자문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뭐라고! 색깔도 없고, 형태도 없으며, 질서도 없고 빛도 없이 외부적 사물들이 두 눈과 정신에 이야기하는 모습을 띨 수 있단 말인가? 단 한 사람의 화가만이 나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요, 나는 그것을 이해합니다.
그는 렘브란트의 <명상하는 철학자>를 이렇게 상기시킬 것이다. 이 그림을 보면, 어둠 속에 잠긴 그 커다란 방, 신비롭게 돌아가는 끝없는 그 계단들, 그림의 그 모호하고 어렴풋한 빛, 불확실하면서도 동시에 선명한 그 장면, 밝은 갈색과 어두운 갈색만으로 그려진 하나의 주제에 확산되어 있는 그 강렬한 색깔, 명암의 그 마법,
의자, 항아리, 구리 그릇과 같은 지극히 하찮은 사물들 위에 이루어진 빛의 그 유희, 이 모든 대상들은 바라볼 만한 가치도 없고 그릴 만한 가치는 더욱 없는 것들인데, 그것들 나름대로 너무도 흥미롭고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에 당신은 그것들에서 눈을 뗄 수 없습니다." ㅡ조르주 상드
요컨대, 심적 현상의 명암은 몽상이다. 이 몽상은 고요하고, 진정시키며, 자신의 중심에서 비치며, 내용에서는 빽빽하지 않지만 언제나 조금씩 비어져 나오고, 자신의 빛으로 자신의 미광을 적시는 그런 몽상이다.
몽상의 시적 측면은 우리로 하여금 의식을 깬 상태로 유지하는 그 황금빛 심적 현상에 접근하게 해 준다. 촛불 앞에서 몽상은 그림으로 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불꽃은 우리를 깬 상태로 있게 하는 그 몽상의 의식 속에 우리를 유지해주게 된다. 우리는 불 앞에서 잠든다. 그러나 우리는 촛불의 불꽃 앞에서는 잠들지 않는다.
(18~20p)
"어떻게 명암을 그리지 않고 '묘사할' 수 있단 말인가?
1.
가장 낮은 것 위에 도래하는 신성의 아름다움. 명암은 유한성 위에 수직의 통로를 연다. 저 무한의 별빛 너머로 이어지는 초재성의 심연. 화가는 모호하고 어렴풋한 형태에서 '불확실하면서도 선명한' 색을 본다. '색깔도 없고, 형태도 없으며, 질서도 없는' 명암은 그 부재(不在)로 인해, 가장 강렬한 색채를 입는다. 그의 한없이 낮아짐을 통해,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던 것은 비로소 신비로 물러설 수 있다. 모호한 색깔이자, 어렴풋한 빛은 눈을 뗄 수 없는 비밀을 갖는다.
2.
'심적 현상의 명암은 몽상이다.' 그것은 우리를 잠들면서 동시에 잠들지 않게 한다. 깨어있으나, 깨어있지 않은 판단 중지(epochē)는 유한성의 '빠져있음'을 잠재운다. '언제나 조금씩 비어져 나오는' 작은 불꽃. 존재자는 불꽃의 이미지, 열림을 통해 그곳으로 향한다. 비로소 몽상은 '황금빛 심적 현상'이자, 저 무한을 향해 피어나는 꽃이 된다.
그러나, 고요한 중심이자, 빛은 생성과 동시에 스러진다. 중심에 충실하나 빽빽하지 않은 불빛 사이로, 끊임없이 어둠은 침입한다. 그들의 끝 간 데 없는 전언철회는 무한히 열려있는 대화이다. 끝없는 에로스이자, 몽상은 그 중심에 완전히 낯선 것, 가장 멀리서 오는 손님을 향해 나를 내어주는 사건을 만든다. 그 불가능한 순간, 비로소 '나'는 잠들고 '내가 아닌 나'는 깨어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