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 읽기(9)
불꽃은 위를 향해서 흘러가는 모래시계이다. 불꽃은 부서져 내리는 모래보다 더 가벼운데도 자신의 형태를 만들어 낸다. 마치 시간 자체가 무언가 해야 할 게 항상 있는 것처럼 말이다. 불꽃과 모래시계는 평화로운 명상 속에서 가벼운 시간과 무거운 시간의 교감을 표현한다. 나의 몽상 속에서 그것들은 아니마의 시간과 아니무스의 시간의 교감을 말한다.
불꽃 앞에서 밤샘하는 자는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그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불꽃은 꺼지기 쉬우면서도 꿋꿋하다. 한 번만 바람이 불어도 이 불빛은 꺼져 버린다. 불씨 하나가 그것을 살린다. 불꽃은 쉽게 태어나고 쉽게 죽는다. 삶과 죽음은 여기서 잘 병치될 수 있다. 삶과 죽음은 그것들의 이미지 차원에서 보면, 잘 만들어진 대립물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깊이 몽상하면, 삶과 죽음 사이의 이와 같은 사유의 아름다운 균형은 상실된다. 촛불의 몽상가의 마음속에 '꺼진다'는 이 낱말은 얼마나 대단한 울림이 있는가. 꺼진다는 동사의 가장 큰 주어는 어떤 것일까? 생명인가 촛불인가? 은유화하는 동사들은 지극히 이질적인 주어를 작동시킬 수 있다. 꺼진다는 동사는 소리와 심장, 사랑과 분노 등 아무것이나 죽게 할 수 있다.
꺼지는 촛불은 죽어가는 태양이다. 촛불은 하늘의 별보다 더 조용히 죽는다. 심지는 구불구불해지고 검게 된다. 불꽃은 그것을 조이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마약을 먹었다. 그래서 불꽃은 잘 죽는다. 그것은 잠들면서 죽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삶과 우주의 삶에서 모든 것은 극적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촛불을 동반하고 몽상할 때 두 번 몽상한다. 불꽃 앞에서 명상은 파라셀스의 표현을 빌리면 두 세계에 대한 찬미이다.
(37~39p)
1.
촛불의 초현실적 이미지는 두 세계를 향한 찬미다. 아니마와 아니무스, 가벼운 시간과 무거운 시간. 불꽃은 수직적 흐름을 통해 낮고 평평하며, 이항대립적인 편협함을 넘는다. '두 번 몽상'하며 깨어나는 깊음은 두 세계를 극적으로 잇고, 동시에 단절하는 낯선 꿈이다. '평화로운 명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교감은 결코 평화롭지 않은 것과 함께이기에, 몽상가는 복수(複數)로 존재한다. 그는 사유하지 않고 시를 쓰며, 책을 읽지 않고 죽음을 사유한다.
2.
몽상가는 서서히 촛불을 닮아간다. 단 한 번의 바람에도 쉽게 스러지는 약함은 자신의 형태를 계속해서 생성하며 동시에 죽어간다. 그도 자신의 죽음을 사유하며, 잠들면서 동시에 깨어난다. 불가시 속의 가시로서 불꽃. 끊임없이 자신의 형태를 감추고 드러내는 빛이자 어둠.
3.
삶과 죽음의 이분법을 넘어선 '상실'은 꺼져감의 이미지이다. 촛불은 찰나의 어둠, 불빛의 비어있음을 '꺼짐'의 형식으로 감싸 안는다. 높이 상승하려는 흰 빛을 모든 방향에서 환대하는 죽음 역시 불꽃의 현상이다. 비로소 두 세계를 향한 서로의 어루만짐은 죽음 속에 들어온 낯선 생이자, 삶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차가운 꺼짐의 시적 몽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