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인간」모리스 블랑쇼 읽기(22)
나는 무지에 의해 헐벗은 단어에 내맡겨진다. 그 단어들이 나를 무지의 주인이 되게 한다는 생각은 순진한 것이다. 분명 그것은 어떤 순간에, 나의 내면이나 다른 이들의 내면에 마찬가지로 그것들을 배치한다. 우리가 수월할 죽음에 뒤섞일 수 없는 단 한 개의 종말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변환에 다다라서 그가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맡겨야 할 것은 바로 이 괴기스러운 기억이다. 그는 마치 그 단어들 중 하나에 자기 삶ㅡ신비스럽게도 그의 삶을 동반하기를 지속하는 희망ㅡ을 숨기는 것 같았다. 단 하나의 생각, 살아 있는 단 하나의 존재, 그것이야말로 분명한 우리가 상상도 못 한 한 단어일 것이다.
우리가 그에 대해 생각할 때, 이 또한 내가 그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기다림, 인접성 그리고 기다림의 먼 곳, 우리를 작은 존재로 만드는 증폭. 우리를 쓰다듬는, 그리고 우리 속에서 환상을 어루만지는 명백성.
그것은 부재성이 아니다. 부재성의 주변이자, 그의 부재로 인한 감정에 우리가 둘러싸이는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 자신에 관한 무엇인가를 아끼고 있진 않은지 알기는 어렵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희망이라면? 우리의 남은 것이라면? 우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얼마나 낯선 감정인가! 부지불식간에 그를 도와야 한다는 것과 부지불식간에 미지의 움직임에 의해 굳건히 우리의 것을 지키면서도 그의 자리를 지키도록 돕는 것, 그가 없는 우리가 되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은 얼마나 신비로운 의무인지!
너무 많이 묻지 말고, 그에 대한 질문에서 벗어나 위험하고 불안하며 위선적인 이 궁금증에서 도피하자. 그것은 또 거꾸로 그가 우리에게 보이는 것에서 도망치는 것이기도 하다. 그를 추방하거나 아니면 우리를 추방하거나 하는 일은 매우 쉬운 일이다. 그가 나를 변화시키려는 이 감정에 맞서 싸울 필요가 있다. 그는 나를 바꿀 수 없다! 나를 바꿀 수 없다!
(46~47p)
1.
창조적 파괴는 서늘한 결심이다. 무한의 도래에 전적으로 응답한 이후, 내던져진 존재. 텅 빈 장소를 헤매는 이로부터 시작된, 전적으로 다른 삶의 형식이다. '위선적인 궁금증'을 넘어서는 열정은 부재로 인한 철저한 고독을 감내하는 일이기에. 텅 빈 주체의 첫걸음은 차가운 투쟁 속에서 생성된다. 오직 '그가 없는 우리가 되는 것을 멈추지 않는' 최고의 의무이자, 계시받은 단독성.
2.
'나를 바꿀 수 없다'는 주체성으로의 회귀가 아니다. 불가능한 싸움을 지속하는 몸의 구체성이자, 상처투성이인 얼굴의 현현이다. 피 흘리며 흐느끼는 고독은 누구도 알지 못하기에. 온전히 받드는 기사도는 '그를 위함'이 아니라, '그의 비어있음'을 향한 투쟁이다. 기이한 전투는 오직 부재의 주변을 머무르며, 공허의 칼을 휘두른다. 여전히 쓸쓸한 신비로 남는, 텅 빈 장소.
3.
'헐벗은 단어'는 바깥의 언어다. 존재자의 의지를 넘어선 내맡겨짐(Gelassenheit). 텅 빈 하늘에서 시작된 '단 한 개의 종말'은 '괴기스러운 기억'이다. 무지한 주체, 비어있음을 소유하려는 순진함은 '수월한 죽음'을 가져올 뿐이다.
얕은 죽음을 넘어선 심연이자, 내맡겨진 신비. '우리를 작은 존재로 만드는 증폭'은 약함과 강함의 극단적 시차를 생성한다. 끝 간 데 없는 사랑은 기다림 속에서 '환상을 어루만지는 명백성'이기에. 먼 곳이자 가까움은 전적으로 새롭게 '배치'된다. 비로소, 기이한 동반은 그와 함께 이어지는 삶의 예찬이자, 끔찍한 '쓰다듬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