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사건으로 현재뿐인 존재

「최후의 인간」모리스 블랑쇼 읽기(27)

by 김요섭



그의 시선 하에, 얼굴도 이름도 없는 힘 속에서 우리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도록 내맡기고 싶은 유혹. 나는 이러한 힘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고 이 매력적인 힘을 따르고 우리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강요당하는 이 낯섦의 기호들을 알게 되었는데, 우리는 이 낯섦에서 인간의 얼굴을 빌려왔던 것이다. 아마도 그 낯섦은 그와 우리 사이에 존재하던 공간이었을 것이다. 그 공간은 나에게 마치 진리도 목적도 없는 존재, 모호하지만, 생생하게 살아 있어서 언제나 우리에게 삶을 제공할 수 있고 오직 우리의 모습과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전혀 다른 존재들로 탈바꿈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들로 채워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더 이상 나의 동일성을 지킬 수 없을 것에 대해 두려워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녀와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우리 쪽을 조종하고 있었던 의심의 시선과 힘에 대해 불안감을 지니고 있었다.


압축되고 잘게 잘린 거리: 공포가 존재하지 않는 공포스러운 것. 차갑고 메마른 움직임, 희박한 생명, 도처에 존재하는 움직이고 얽힌 어떤 것. 마치 이 공간에서 분리는 우리가 자신으로부터 이미 분리된 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밖에 없도록 함으로써 생명과 힘을 얻는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여기 이 비명들과 침묵과 말들의 메마름, 준엄한 탄식은 들리길 원치 않는다. 소리 없는 탄식은 증폭되지 않은 채 교차된다.


존재의 삶은 소멸해 가면서도 커지고, 스스로를 소진하면서도 발전해 가고, 그것 자체로 놓아두면서 보이지 않게 관계들을 좌절시키는 것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우리를 기만하는 인상은 진짜 거짓이 아닌 오류로 헛되이 변화를 가져다주는데, 그것은 마치 우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외양만을 소유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떨어져 나가면서도 유혹하는 움직임, 이를 통해 얼굴은 타인을 끌어들일 만큼 매력적이게 되고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해 이끌려 온다. 모두 함께 필연적이지만 형상화하기는 불가능한 전혀 다른 형태의 미래를 만들어 가기 위한 것처럼. 하지만 그의 현존만큼은 예외다. 나는 그를 기억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뿐인 존재를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가끔 내가 느끼는 것과는 반대로 나는 그를 더 이상 잊지 않고 있었다. 망각은 현재를 좌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53~54p)




1.

'현재뿐인 존재'는 아름다움의 완전한 형태다. 기억할 수 없고, 망각할 수도 없는 '그의 현존'. 영원히 멀어지면서도, 매혹하는 움직임은 '소리 없는 탄식'이다. 동일자를 소멸하며, 커지는 외양. 이름 없는 얼굴은 '관계를 좌절'시키며 환대한다. 공간에서 분리되며 생성된 거리의 파토스.


2.

망각의 얼굴과 우리 사이는 매력적인 유혹이다. 절대적으로 낯섦은 그와 나 사이, 장소 없는 장소를 연다. 그곳을 가득 채운, '증폭되지 않은 채 교차되는' 침묵. 부재의 현전은 고통과 함께 현현한다. 메마른 말들, 소리 없이 울리는 끔찍한 비명. '소진하며, 발전시키는' 기이한 형체. '낯섦의 기호'는 죽음의 언어이자, 기묘한 감응이다.


3.

그녀는 그와 같이, 나를 탈바꿈한다. '진리도 목적도 없는 존재'는 정처 없음으로 자신을 비운다. 오직 변용의 순간만 진리 사건이 되는, '모호하지만 살아있는' 열림. 텅 빈 주체는 비로소 '떨어져 나가면서도 유혹'하며, '전혀 다른 존재들로 탈바꿈'한다. 목적 없는 진리, '희박한 생명'이자 우리 사이, 복수적 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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