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끝단에서 가능한, 어떤 표현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죽음에 대하여」 읽기(4)
1.
'죽음'과 '출생'은 서로 반대되는 '사건'이 아니다. '무(無)'에 뒤따라오는 시간인 '탄생', 존재자에 '앞선 사건'으로서 '죽음'. 이를 '대칭적 신화'로 해석해서는 존재의 의미에 결코 다가서지 못한다. 오직 '연속적 현재'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복수성을 감각할 때만 가능한. 어떤 이해는 '이쪽'과 '저쪽'이 아닌, '미래'와 '과거'의 구분 너머에 있을 뿐이다. 장소 없는 장소에 머무는 절대적으로 다른 동일성.
2.
우리의 '눈'은 '시각을 제한'한다. 밝은 눈은 볼 수 있으나, 동시에 '제한적'으로 봄을 의미하기에. '시계(視界)' 너머에 있는 '불가시'의 부재에 닿을 뿐이다. 모든 가능성이 열린 명증성의, 닫힌 나르시시즘. 낯선 불명으로 늙어버린 몸은 젊음과 분리되어 있지 않으나, 기이한 시차 가운데 머문다. 죽어감 안에 사는 '육체'의 아이러니. 그러나 어떤 표현은 오직 불가능 안에서 비로소 사유될 수 있다. 유한성의 '죽음' 만이 줄 수 있는 서늘한 '열정'이자 기이한 '활력'. 무명자의 살아낸 계절과 닫혀가는 언어의 끝단에서 가능한,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시간.
(18~2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