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조부 투파키와 마주친 에블린. 알파 조이는 그녀를 살해하지 않고, 자신만의 왕국으로 안내한다. 황폐화된 세계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조부 투파키. 검게 타들어간 베이글 모양은, 텅 빈 중심의 섬뜩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한 번도 제대로 만져진 적 없는, 사랑의 실패를 그대로 담은 끔찍한 형태. 타나토스적 파괴만 남은 아토피아(Atopia)는 열려있는 듯 보이나, 전적인 닫힘일 뿐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도착하지 않은, 부재의 상징. 영화 초반, '원형 거울'과 언뜻 유사하나, 절대적으로 다른 형태이다. 어떤 절대가 도착했으나, 지금은 부재하는 장소인 텅 빈 동그라미. 그러나 투파키의 검은 곳은, 단 한 번도 사랑이 도착하지 않았기에, 돌이킬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재의 현현을 기다리는 에로스와 닫힌 타나토스의 극단적 대비.
에블린의 뒤에 선 허기진 부정성은, 이제 그녀를 꿰뚫어 본다. 심연 깊은 곳에, 잠재된 폐허의 유산인 그 '모든 것'의 텅 빔. 다시 타오를 수 없는 존재는, 그녀에게 속삭인다.
"전부 다 부질없다는 것 기분 좋지 않아?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괴로움과 죄책감이 사라지잖아"
2.
'할 수 있음'과 번아웃의 흔적을 떨쳐내지 못한 에블린에게, 조부 투파키의 유혹은 너무 강렬하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사랑의 고백(알파 디어드리에게 했던)'으로 시작했던 멀티버스의 험난한 여정. 그러나 여전히 충분치 못한 에로스는, 이 세계의 절대적 강자를 상대하기에 턱없이 부족할 뿐이다. '복수성(複數性)'을 획득해 가는 과정체에서, 느닷없이 중단을 통보받는. 혼돈의 시간 한가운데 도착한 악마의 속삭임은, 그녀를 무너뜨린다.
"그저 돌이 되는 거야"
조이의 거칠고 메마른 중심을 납득시키기에, 턱없이 부족하기만 한 에블린. 그녀의 사랑받지 못함은, 결국 사랑할 수 없음으로 이어지며, 다시 자신을 날카롭게 찌른다. 불행한 유산(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던)의 고통스러운 상기(想起). 무엇보다도, 깊은 상처는 완벽한 무를 향해 몰락하려는, 강한 충동에 휩싸인다. 완전히 무감한 존재가 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를. 해결되지 않는 사랑의 부재는, 멀티 유니버스를 타나토스로 물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