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에 가까운 밤, 짙은 어둠 속을 흰 염소는 홀로 걷는다. 낮에 즐겁게 뛰놀던 때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고 두려움에 내장까지 떨리고 있다. 초저녁에 들려왔던 주인아저씨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죽음의 체취가 산에 흩뿌려진다. 반대편 봉우리에서 날카로운 눈매가 공포에 휩싸인 발자국을 느긋하게 추적한다. 그것이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기괴한 괴물처럼 변해버린 나무는 그의 움직임을 노려보고 있다. 잔뜩 주눅이 든 염소는 참나무 뿌리에 차여 몸을 굴렀다. 누가 들을까 봐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가쁜 숨을 헐떡였다. 짙은 어둠 속을 두리번거렸으나 달빛 아래 우뚝 선 나무 사이로 억세게 돋아난 풀이 보일 뿐이었다.
그때였다. 늑대의 긴 울음소리가멀리서 들렸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돌부리에 발이 차이고 넘어졌다. 피가 흘러 흰털을 적셨다. 그의 피 냄새가 섞인 체취는 늑대를 더 자극할 것이었다.다시 일어나려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밤늦게까지 그를 애타게 찾던 주인아저씨의 목소리도 이미 외면한 터였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모든 게 뒤엉켜 있었다.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스스로를 달랬다. 처음 울타리 밖으로 자신의 의지로 나왔던 때를 생각했다.
늑대의 울음소리가 났던 반대편으로 한참 달렸다. 두 봉우리가 악마의 뿔처럼 돋아난 정상 부근에서 염소는 멈춰 섰다. 그는 지친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순간 무엇인가 허공에 떠있는 것이 보였다. 붉게 이글거리는 두 개의 구멍이 그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염소는 헛것이 보이는 줄 알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제는 날카로운 두 눈만이 아니라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선택
늑대는 그 앞에 당당한 모습으로 서있다. 그가 가쁜 숨을 고를 시간 동안 늑대는 천천히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정신을 차린 후 자신의 처지를 이해했을 때, 늑대는 입을 열었다.
"나는 너의 고통을 멈추게 할 것이다." 늑대는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날 잡아먹을 건가요?"
"한 번의 도약이 너를 두려움 없는 세계로 이끌 것이다. 나에게 모든 걸 맡겨라."
"만약... 원하지 않는다면요?"
"그래도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달라질 것이 없이 너의 고통만 더할 뿐이다"
그는 늑대가 틀린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아직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었다. 염소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는 다시없을 순간을 떠올렸다. '나는 울타리 밖을 원했어. 짧은 시간이었지만 푸른 풀밭에서 자유롭게 뛰었지. 계곡의 물은 어찌나 시원했던지. 새하얀 암컷 염소와 만나 냉이꽃도 함께 씹었고 우린 서로를 향해 몸을 기대고 얼굴을 맞댔지.'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린 염소는 평온해졌다. 냉혹한 현실 앞에 맞닥뜨렸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차분했다. 그는 늑대에게 잠시 시간을 달라고 말하고 주변을 살폈다. 가까이 있는 냉이풀로 발걸음을 옮겼다. 차분하게 풀을 뜯으며 그는 자신의 심장 박동과 온몸에 퍼지는 뜨거운 피의 온기를 느꼈다. 한동안 대지에 머리를 숙이고 있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늑대를 향해 가지런한 이빨을 드러냈다. 그것은 기다렸다는 듯 염소를 향했고, 그는 활시위를 당기듯 뒷다리에 힘을 실었다.
'우리들은 매를 맞고 눈물을 흘리는 노예가 아니라, 배불리 먹고 마셔서 이제는 아쉬운 바가 없는 왕처럼 이 땅을 떠나야 한다.' - 영혼의 자서전, 카잔차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