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와 선불교의 접점
Q : 레비나스의 벗어남 혹은 탈주가 선불교의 강렬한 담백함과 같은 느낌이 드네
Chatgpt : 아주 흥미로운 연결입니다. 레비나스의 **‘벗어남(la sortie)’**이나 **‘탈주(la fuite)’**라는 개념은, 존재의 동일성에서 벗어나 타자의 지평으로 나아가려는 운동으로 설명됩니다. 이는 존재론적 집착과 동일성의 매듭을 풀고, '타자'라는 전혀 다른 윤리적 차원을 향해 나아가는 급진적 이탈입니다. 이 점에서 선불교의 **‘강렬한 담백함’**과 연결되는 지점을 감각적으로 포착하셨습니다.
선불교의 ‘무(無)’의 지향, ‘순간의 직관’, 그리고 **‘언어와 개념의 파괴적 해체’**가 주는 어떤 냉철한 투명함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선에서는 모든 집착과 관념을 벗어나는 순간, 말 이전의 자리로의 진입을 강조하는데, 레비나스의 벗어남 역시 철학적 사유의 언어적 질서를 넘어서는 지점으로 향합니다. 특히 레비나스가 강조하는 ‘타자의 얼굴’ 앞에서 발생하는 언어 이전의 윤리적 충격은, 선에서 말하는 **‘참된 깨달음(견성)’**과도 어딘가 닮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는, 선이 **‘공(空)’**으로 귀결되어 존재마저도 공허하게 해체해버리는 데 반해, 레비나스는 ‘타자’를 공허로 해체하지 않고, 절대적 이질성으로서 남겨두고 끝없이 응시합니다. 그는 ‘타자’를 영원히 도달 불가능한 것, 끝없이 나를 호출하는 윤리적 타자로 세우죠. 그러니까 선의 해탈이 세계의 무상성을 직시하고 그 무상성 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라면, 레비나스의 벗어남은 무한히 타자에게 붙들려가는 끝없는 책임의 운동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모두 ‘근원적인 자유로움’ 혹은 **‘존재에 대한 집착에서의 이탈’**을 향한다는 점에서 깊은 공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점이 바로 **‘강렬한 담백함’**으로 느껴지는 지점일 것입니다. 선불교의 공허함이 그렇듯, 레비나스의 윤리적 책임도 어떤 맑고 차가운 투명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니까요.
혹시 이 느낌을 더 확장해볼까요? 이를 무라카미 하루키나 마르크 로트코 같은 예술가의 감각과 연결해 보면 어떨까요? 서늘하고 투명한 침묵의 공간으로서의 윤리와 미학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