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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파 유미경 May 14. 2020

우리 집 시그니처

미각의 중심에 자리 잡은 장독대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우리 집에서 제일 볼만했던 것은 장독대였다. 드라마에 나오는 대가댁 수준은 아니었지만, 당시 토건 일을 하시는 작은 아버지 덕분에 크고 작은 장독 열댓 개가 올라간 시멘트로 마감한 장방형의 장독대가 있었다.      

장독대 왼쪽으로는 이웃집과 함께 쓰는 우물이 있었고, 앞쪽으로는 수도꼭지가 연결된 넓은 개수대가 있었다. 개수대 위에는 등나무 덩굴이 덮여 있었고 그 주변엔 채송화, 함박꽃, 칸나, 향나무, 동백나무 등이 펼쳐져 있는 꽃밭이 있었다. 가장 양지바른 곳에, 부엌과는 직방으로 보이는 곳이었다. 나는 종종 사기그릇을 들고 간장이나 고추장, 된장을 푸러 장독대로 심부름을 다니곤 했다.       


장독대에는 장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장독대 뒤편으로는 아이들 2, 3명이 앉을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비가 올 때는 장독과 장독 사이에 우산을 걸쳐 놓고 소꿉놀이를 하거나 키 큰 간장독 뒤에 숨어 숨바꼭질을 했다. 어떤 날은 마루 끝에 서서 장독 뚜껑 위로 튕겨 오르는 투명한 빗방울을 바라보거나, 또 겨울날이면 장독 위로 소복이 쌓인 눈을 뭉쳐 남동생과 눈싸움을 하기도 했다.     

우리 집에는 두레반에 둘러앉아 밥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 6남매 빼고도 늘 2, 3명씩은 객식구가 있었다. 올해 93살 되는 친정어머니는 우리 집을 거쳐간 ‘친인척만 23명이나 된다'면서 억울해하실 때도 있다. 부지런하셨던 부모님은 부업으로 돼지도 치고, 닭도 기르고, 장작도 묶어 팔고, 연탄도 찍어 팔았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 집 인심은 모두 장독대에서 나왔을 것 같다.

     

우리 집은 내륙의 한가운데에 있는 소도시에 있어서 딱히 ‘미각의 추억’을 장식할만한 음식이 없다. 맛있는 민어도 없고, 순대도 없고, 게장도 없다. 한참 기억을 더듬은 끝에 찾아낸 것은 역시 된장, 간장, 고추장이다. 설마, 내가 이렇게 된장에 사로잡혀 있는 이유가 장독대 뒤에 숨어서 너무 오래 맡고 있었던 냄새 때문은 아니었을까. 어쩜, 그때의 장 냄새는 내 유전자와 뇌리에 깊이 박혀있을지도 모른다. 그뿐이 아니다. 메주 쑤는 날 한 줌씩 먹던 구수한 삶은 콩, 간장 달이던 냄새, 메주 띄우는 냄새, 청국장 띄우는 냄새 등 장과 관련된 기억들만 한 보따리다.  


'미각의 기억'속을 들여다보니, 먹었던 음식도 다 그랬다. 두부가 들어간 된장찌개, 시큼한 김치 넣은 청국장찌개는 기본이었다. 간장으로 졸인 콩조림, 고추장 멸치볶음, 간장 깻잎장아찌, 고추장 마늘종 장아찌 등은 일상의 반찬이기도 하고, 도시락 반찬이기도 했다. 저녁으로 죽도 자주 먹었다. 나보다 7살이 많았던 큰 오빠는 그때 얼마나 먹었던지 지금은 죽을 쳐다보기도 싫다고 한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어서 그때 먹었던 아욱죽, 김치죽, 콩나물죽이 그립기까지 하다.        


나는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좋은 음식을 일상으로 먹으려고 늘 궁리하는 사람이다. 식품영양학을 공부한 내가 꼽은 최고의 식재료는 된장과 간장이다. 어떨 땐 음식 자체보다 된장과 간장을 넣는 것이 목적일 때도 있다. 장을 사용하여 꽤 맛있는 음식이 되면 나는 남편에게 묻는다. "이거, 우리 집 시그니처 요리로 할까?” 꼭 프랑스 가정의 예가 아니라도 집집마다 한두 가지 자랑삼아 내놓을 요리는 있어야 한다. 간장 불고기, 오징어 고추장볶음, 시래기 들깨 된장국, 꽃게 다리 넣어 끓인 된장찌개는 내 나름대로 합격점을 주었다.   

    

요즘엔, 아침으로 빵을 먹는 날로 많아지면서 부쩍 소스에 관심이 간다. 다음 우리 집 시그니처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간장 샐러드다. 소스에는 버진 올리브유, 발사믹 식초, 꿀(매실청), 그리고 3~5년 발효된 생간장이 들어간다. 비율은 3 : 2 : 2 : 0.5 정도.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 놓고 샐러드를 먹을 때마다 뿌려 먹는다. 간장의 양은 식성에 따라 조절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간장을 먹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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