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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사벨라 Jul 15. 2024

[끼니들]

시큼 쿰쿰 오이지



 오이지의 계절이다. 더위에 지친 남편의 입맛을 순식간에 끌어 올리기 좋은 음식 중 하나다. 물기를 꽉 짜서 무치는 것도 좋아하는데 동그랗게 송송 썰어 식초를 몇 방울 떨어뜨린 물 오이지를 더 좋아한다. 오늘도 물 탄 오이지 두 개에 밥 한 그릇을 뚝딱했다. 남편은 오이지를 어릴 때부터 좋아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여름이면 매번 상에 오르던 것을 한두 번 먹어봤지만, 시큼하고 쿰쿰한 냄새 때문에 도무지 손이 가지 않았다고. 성인이 돼서야 자연스럽게 찾게 됐고 어느 순간 좋아하는 음식으로 남았단다.

 친정에서는 오이 농사를 지었다. ‘장마에 오이 크듯 한다’라는 속담처럼 오이는 물만 충분하면 무럭무럭 잘 자란다. 오뉴월 비닐하우스에 사람 키보다 큰 오이 덩굴이 지지대를 올라타서 노란 꽃을 대롱대롱 피운다. 처음 수확하기 시작하면서 오이밭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오전과 오후의 시간차로 눈에 띄게 오이가 커버린다. 분명히 저 구역에서 아까 딴 것 같은데 커다란 오이가 또 매달려 있다. 연쇄적으로 순식간에 여기저기 큰 오이들이 사람 손길을 기다린다. 부모님은 하루에 두 번씩 박스 포장으로 바쁘셨다. 그 수확량이 굉장했다.

 

 

오이가 흔하다 보니 우리 집에서는 한 번에 100여 개씩 오이지를 담갔다. 더운 여름 엄만 물 탄 오이지에 얼음을 동동 띄워 상에 내셨다. 아무리 얼음으로 날 유혹해도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그 맛에 적응되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결혼해서 오이지를 담근다. 어릴 땐 먹지 않았던 음식을 만들기 위해 여러 단계 정성을 들인다. 우리 집 레시피를 찾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처음에는 엄마에게 배운 전통 방식인 소금물을 팔팔 끓여 붓는 방식이었다. 그 맛이 익숙해서인지 몇 년 동안, 이 방법만 고수했다. 그러다가 소금과 물엿, 소주를 적당 비율로 맞춰 담아봤다. 끓이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어 이 방법도 몇 년 이어졌다. 이것보다 더 간단한 소금과 설탕을 넣어 끓이지 않고 담그는 방법도 해 봤다. 하지만 물엿이나 설탕이 들어간 만큼 단맛이 나서 물 탄 오이지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돌고 돌아 조금 번거롭더라도 지금은 엄마에게 배운 전통 방식으로 담근다.


 오이 반 접을 구입한다. 굵은소금으로 닦아 겉면에 농약 성분을 없애주고 오이의 쓴맛을 잡아준다. 이때 오이에 붙어있던 노란 꽃과 가시는 제거하면서 흐르는 물에 헹궈 반나절 정도 물기를 뺀다. 국대접 계량으로 물(12):소금(1) 비율로 소금물을 팔팔 끓인다. 씻어놓은 오이에 바로 부은 다음 상온에서 누름 판으로 눌러 숙성한다. 2일 후 물만 덜어 끓여서 식혀 붓는다. 2~3일 더 상온에 둔 다음 한 번 더 끓여 식혀 붓고 냉장 보관을 한 다음 먹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종종 어릴 때 먹었던 음식을 찾게 되는 '맛의 회귀 현상'을 경험을 한다. 거기엔 어렸을 때부터 좋아한 음식도 있지만 입맛에 안 맞아 잠깐 접해본 음식도 있다. 그 맛을 잊지 않고 찾는 이유는 어릴 때 먹어본 음식이 입맛을 결정했고 그게 또 내 몸에 맞아서일 것이다.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 음식에 얽힌 저마다의 에피소드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 ‘오이지’에는 우리 집만의 이야기가 있다. 오이 향으로 가득했던 비닐하우스. 가시가 앙칼지게 서 있던 싱싱하고 잘생긴 오이들. 하우스 안에 쌓여가던 박스. 힘들었을 두 분을 위해 미숫가루를 타다 드리고 칭찬받던 어린 나. 여름철 얼음 동동 오이지는 엄마 아버지의 더위를 잠시나마 식혀주었다. 깔깔한 입맛에 식욕을 돋게 했을 것이다. 밥상에 모여 앉은 젊은 아버지와 엄마, 형제들. 그때의 온도와 분위기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오이지엔 여러 가지 축적되어 온 이야기가 있다.

 어릴 때 길든 맛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중간에 단맛 나는 오이지도 먹어봤고, 상큼한 피클에 맘을 빼앗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소금물을 끓여 담근 오이지로 돌아왔다. 내 입맛의 뿌리를 찾아온 것이다. 지금은 우리 딸과 아들이 엄마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오이지를 맛만 보는 수준이다. 이때 약간의 찡그림은 필수. 역시 오이지는 어른들만의 음식인가 보다. 내가 경험한 것을 내 아이들도 겪게 되겠지. 그리움으로 다시 찾게 됐다가 그 음식 고유의 맛을 알게 되리라. 그건 바로 이야기가 있는 엄마의 손맛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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