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 집 부엌에 백자와 청잣빛의 작은 항아리가 두 개가 있었다. 관상용이 아니라 부엌 찬장에서 사용하는 생활 도자기였다. 백자엔 소금을 담아 쓰고, 청자엔 설탕을 담아 사용하는 용도였다. 그 시절 찬장은 제법 길었다. 왼쪽 끝엔 간장, 설탕, 고운소금, 깨소금 등 양념류를 두었는데 그 맨 앞자리를 설탕 항아리인 청자가 차지했고, 반대편에는 굵은소금이 담긴 하얀 백자가 홀로 놓여 있었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간식으로 엄마가 만들어 주신 술빵, 찐빵, 고구마, 누룽지 등을 먹었다. 특별한 게 없는 날엔 엄마께서 직접 볶아 만든 미숫가루가 있었다. 대접에 찰랑찰랑 물을 받아 청자 항아리에서 흑설탕 한 스푼 넣고 미숫가루가 날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저어주면 달콤하고 고소한 그날의 간식을 맛볼 수 있다.
가을이 되면서 아삭아삭 단감이 나올 때쯤, 제법 큰 감이 바람에 떨어진다. 상처 나지 않은 감을 주워서 깨끗이 닦는다. 젓가락으로 두세 군데 구멍을 뚫는다. 어느 정도 물이 잠기게 물을 붓고 백자항아리에서 소금은 크게 떠서 잘 녹여준다. 며칠이 지나면 아삭아삭 단감 못지 않은 살짝 간이 된 우린 감을 먹을 수 있다. 부엌에서 요리하는 엄마에겐 양념통으로, 우리에겐 미숫가루를 타 먹고 감을 우려먹는 설탕과 소금 그릇으로 청자와 백자 항아리는 아주 친숙한 물건이었다.
청자와 백자가 우리 집에 온 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이었다. 엄마 아버지가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대가족으로 사시다가 아랫집으로 분가하면서 할머니께 받은 항아리였다고 한다. 내 눈에 비친 그 항아리는 그저 늘 같은 자리를 지키는 물건이었다. 붙박이장처럼….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돈과 귀중품이 아닌 다른 것에 탐을 낸 도둑이 나타난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문을 열어놓고 사는 시골 마을의 특성을 이용해 값나가는 도자기를 골라서 도둑질하는 일당이 다녀갔다는 것이다. 벌써 옆 동네는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고 이번엔 우리 마을 차례였나 보다. 우리 집도 예외 없이 설탕 항아리인 청자와 소금 항아리인 백자를 잃어버렸다. 엄마는 시어머니께 물려받은 의미 있는 항아리를 잃어버린 것에 무척 속상해하셨다. 엄마 손과 우리의 손때가 골고루 묻은 두 항아리는 그렇게 없어졌다.
난 언니와 가끔 소금 항아리와 설탕 항아리가 없어진 것에 대한 아쉬움을 얘기한다. 그 항아리가 청자이고 백자여서 아까운 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우리의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것이어서 그렇다. 엉뚱한 사람에게 가 있을 설탕 항아리와 소금항아리의 생김새가 지금도 생생히 떠 오른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우리 형제는 엄마의 유품을 몇 개씩 나눠 가지고 있다. 난 은 촛대와 엄마가 쓰시던 실패, 바늘이 담긴 반짇고리함을 가졌다. 그것을 볼 때마다 시골 부엌 찬장에서 은은하게 빛나던 설탕 항아리와 소금 항아리를 다시 찾아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