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징어
봄가을 꽃게만큼이나 꼭 먹고 넘어가야 하는 제철 어류가 있다. 바로 통통한 갑오징어, 데친 갑오징어를 초고추장에 찍어 먹거나 오이, 도라지와 새콤달콤하게 무쳐내면 색감만으로도 밥상이 풍부해진다. 대파기름 듬뿍 내 양파와 함께 볶아내면 또 어떤가, 제철에 먹는 갑오징어의 찰지고 담백한 맛은 한번 알고 나면 그냥 보내기 힘든 식재료다.
유년 시절, 우리 윗집에 살던 내 친구 M의 아버지는 조그만 배를 가지고 계셨다. 그 당시 우리 마을은 주된 업이 농사였다. 보통의 아버지들이 논밭으로 일하러 가실 때, M의 아버지는 농사일 대신 배를 타고 나가 갑오징어와 생선을 잡아 오셨다. 그때의 기억으로는 집에 배가 있는 집이 극히 드물었다. 우리 집은 아랫집에 살았던 덕분인지 갑오징어를 자주 먹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내성적인 M이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는 일이 생겼다. 몇 날 며칠을 분홍 소시지와 달걀말이를 먹게 된 일이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 동네 출신 선생님이셔서 우리들 사정을 잘 아는 분이셨다. 당연히 M의 집에 갑오징어가 흔할 거라는 것도 아셨을 터였다. 점심시간 교실을 둘러보신 선생님은 분홍 소시지와 달걀말이 도시락 반찬을 들고 오셔서 “M아! 나랑 도시락 반찬 바꿔 먹자” 하셨던 것. 그 시절 최고의 도시락 반찬 분홍 소시지를 본 아이들은 “와”하며 모여들었고 군침을 흘렸다. 막상 M은 얼굴을 붉혔지만 내심 좋아했던 게 생각난다.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그 어떤 도시락 반찬도 분홍 소시지를 이길 순 없었다. 그때는 선생님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른이 돼서 생각했을 때 동향인 선생님에게 갑오징어 회무침은 추억의 음식이자 제철 보양 음식이었으리라.
갑오징어는 지방이 적고 단백질이 많은 건강식품이다. 일반 오징어랑 다른 점은 등 쪽에 외투막에 싸여 있는데 이는 두꺼운 석회질 물질(갑옷)로 오징어 뼈라 부른다. 다리는 훨씬 짧고 굵다. 살은 더 두툼하면서 쫄깃하고 담백하다. 보통 신선한 상태에서 회로 먹거나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때 손질이 중요하다. 우선 몸통에 등뼈를 제거하고 눈과 내장 등을 잘 손질한다. 먹물이 터지지 않도록 주의해서 떼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온통 검정 물이 들고 만다. 실제 M의 집에서 갑오징어를 준 날이나, 시장에서 사 온 날은 안뜰 수돗가가 먹물이 터져 온통 까맣게 물들었던 기억이 난다.
‘갑오징어’ 하면 두 가지 색이 떠오른다. 흰색과 검은색. 엄마가 갑오징어의 갑을 떼어내길 기다렸다가 하얀 뼈(조각배 모양)를 받아 물에 띄우며 놀았다. 깨뜨려서 ‘지우개’라 부르며 이름과 다르게 집 담벼락에 하얗게 낙서하는 용도로 가지고 놀았다. 분필이 귀했던 시대에 훌륭한 놀잇감이었다. 갑오징어의 새하얀 몸통과 함께 하얀 낙서가 떠올라 ‘흰색’의 이미지가 강력한 듯하다. ‘검은색’은 바로 먹물주머니가 터졌을 때 주위를 까맣게 물들이던 광경 때문이다. 여러 마리중 한 마리 먹물만 터져도 모든 것을 다 휘감아 버려 주위가 온통 까맣게 변한다.
오징어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어느 해부턴가 일반 오징어 대신 가격이 조금 비싸도 제철엔 갑오징어를 산다. 아이들에게 갑을 보여주고 싶어서 통째로 가져와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싱크대에 풀어놓고 갑을 제거하고 먹물을 조심스럽게 떼어내 깨끗이 손질한다. 초고추장을 만들고 살짝 데쳐서 오징어 숙회로 내놓는다. 오이, 도라지를 더해 새콤달콤 무쳐내기도 한다. 갑오징어 반찬이 있는 날은 밥상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주로 술이 함께 해서 이야기가 길어진다. 그러면서 남편은 보통 오징어보다 갑오징어를 더 좋아하게 됐다고.
난 갑오징어 반찬을 만들 때마다 친구 M과 그 시절 젊은 담임선생님을 생각한다. 그 속엔 노란 계란 물 묻혀 부쳐낸 분홍 소시지도 있다. 음식의 가장 강력한 힘은 추억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나의 갑오징어 추억기는 이제 남편과 함께하는 이야기가 있는 밥상이 더해지고 있다. 제철 음식은 인상 깊은 추억 위에 새로운 추억이 방울방울 더해져 올해도 그냥 넘기지 않고 먹고 넘어갈 수 있는 힘을 만들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