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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희태 Sep 24. 2019

치킨게임에서 벗어나기

조국 사태 진단하기 3

검찰이 급기야 조국 법무부장관의 자택을 전격 압수 수색했다. 청문회를 둘러싼 1차전으로 마무리되는가 싶었던 조국사태가 법무부장관 임명 후 2차전으로 접어들더니 마침내 치킨게임으로 돌입한 것이다. 멈추면 게임에서 질뿐만 아니라 겁쟁이라는 낙인을 피할 수 없고, 멈추지 않으면 양쪽 다 치명상을 입는 것이 바로 치킨게임이다. 나 또한 개인적으로 이 치킨게임에서 ‘편’을 들고 싶은 진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의 비루한 힘이 내가 지지하는 편에게 힘이 될지도, 그것이 나를 포함한 치킨게임의 관람자인 시민에게 유익한지도 확신할 수 없기에 또다시 난 비겁하게 객관성을 표방한 진단이라는 걸 하고자 한다. 늘 그랬듯 딱 세 가지만 살펴보겠다.

검찰은 헌정 사상 최초로 법무부장관 자택을 압수 수색했다.

첫째, 치킨게임의 당사자는 누구인가?
표면적으로는 조국과 윤석렬이 치킨게임의 당사자인 것처럼 보이지만, 조국과 윤석렬은 검찰 개혁을 추진하려는 문재인 대통령과 대한민국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해 온 검찰의 대리인일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과거 노무현 정권 시절, 평검사와의 대화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였던 검찰의 그 네가지 없는 태도를 잊지 않았을 것이다. 나아가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몬 검찰의 그 지극히 악의적인 피의사실 공표(논두렁 시계가 뭐 어쨌다고?)도... 그렇다고 행정수반인 대통령이 직접 검찰에 칼질을 하는 것은 오히려 정치적으로 오해를 살 수 있다. 그렇다고 검찰개혁을 해야 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조국을 대체할만한 마땅한 카드가 널려 있는 것도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검찰은 우리나라 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집단이다. 그런데 사실상 검찰 권력은 빛 좋은 개살구였을 뿐, 늘 자본에 의지하거나 정치에 휘둘려 왔다. 그 과정에서 검찰은 지속적으로 자존심의 상처를 받아 왔을 것이다. 검찰의 선택지는 두 가지일 것이다. 자본과 정치권력에 계속 기생하느냐, 아니면 정우성과 그 닮은꼴 조인성이 주연했던 영화, “더 킹”에서도 나왔듯, 자신들의 깊숙한 창고 안에 보관되어 있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자본도 정치도 벌벌 떨게 만들어 명실상부한 권력의 정점에 서느냐!

영화, "더 킹", 대한민국의 왕은 누구인가?

문재인 대통령이 UN 총회 기조연설을 위해 출국한 당일, 검찰은 마치 쿠데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법무부장관 자택의 압수 수색을 단행했다. 이러한 검찰의 행동에 대해 섣부르게 정치적 편 가르기를 하는 것은 하수의 해석이다. 검찰은 특정 정당에 이익을 위해 움직인 것이라기보다는 검찰, 그 자체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누구나 아킬레스건을 가지고 있다. 검찰의 조국 법무부장관 자택 압수수색은 소위 일반인보다 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을 가지고 있는 정치권력을 향한 선전포고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검찰의 무리수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상태에서 한 생존의 행위일 수도, 아니면 그동안 와신상담을 하며 때를 기다려온 검찰과 그 화신, 윤석렬 검찰총장의 민주주의에 대한 선전포고일 수도 있다.

조국과 윤석렬의 치킨게임에는 문재인 정부와 검찰 이외에도 기득권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마치 샐러드처럼 버무려져 있다. 당장 총선을 앞두고 공성을 해야 하는 자유한국당과 수성을 해야 하는 더불어민주당은 물론이고, 포탈에 기생하며 정보 소비자들의 간택을 받아야만 겨우 생존할 수 있는 기레기 언론, 그리고 그들의 배설해 내는 기사들을 마치 아귀처럼 소비해 온 우리 모두가 이 치킨게임의 당사자이다.  


둘째, 치킨게임의 피해자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당사자가 아닌 치킨게임의 관람자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을까? 우리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치킨게임 속에서 생존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비참한 정치 현실은 사실 치킨게임의 당사자와 관람자가 함께 상호 작용하며 만들어 온 결과다. 동족이 서로 피를 흘려야 했던 6∙25 전쟁 당시, 공산당이 마을을 점령하면 지주들에 대한 인민재판이 벌어졌다. 그리고 다시 국군이 마을을 점령하면 공산당 부역자들에 대한 학살이 이어졌다.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올바른지 묻고 따질 이유도, 여유도 없었던 신념의 치킨게임... 나는 2019년 현실의 모습도 70년 전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손호철 교수의 지적대로 치킨게임이 반복되고 축적되는 사이, 대한민국은 치유 불가능한 반지성 사회로 전락했다.


‘민주화진영’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똑같은 일도 박근혜가 할 때는 반민주적 폭거라고 거품을 물던 사람들도 문재인 정부가 하면 침묵하거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라고 옹호하고 나선다. 지성은 사라지고 “내 편이냐, 아니냐”는 정파만 남은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20대 남성들의 지지율 하락을 둘러싼 논쟁도 마찬가지다. 20대가 교육받은 이명박, 박근혜 때 “제대로 된 교육이 됐을까, 이런 생각을 먼저 한다”는 발언이 보여주듯이, 설훈 의원 등 여권은 비판적 지성을 가지고 촛불혁명과 문재인 정부의 집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고 있는 20대의 절망에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눈 먼 정파성으로 전 정권 탓만 하고 있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20대 남자들만 아니라 20대 여성들도 박근혜 시대에 반공교육을 받았을 텐데, 왜 남성에게서만 지지율이 떨어진 것일까? 결국 ‘내 편, 적의 편’이라는 정파성이 지성적 판단을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파 만능주의에서 벗어나 비판적 지성을 회복해야 한다. (손호철. "반지성의 사회 대한민국". 2019. 3.25. 한국일보)


우리는 특정한 '편'에 서는 것에 매우 익숙하다. 혈연이라는 편, 지연이라는 편, 학연이라는 편... 애초부터 인간이 완벽한 존재였다면 편에 의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빠른 경제 성장 과정에서 늘 결핍이 있어 왔다. 그 결핍을 보완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편을 만드는 것이다. 분단국가로 살아온 우리에게 정치적 신념은 편을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을지 모른다. 애초부터 인간은 코끼리만큼 크지도, 사자나 호랑이처럼 용맹하지도, 치타처럼 빠르지도, 원숭이처럼 나무를 잘 타지도 못했다. 그런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끼리 편을 먹는 것이었다. 같은 편이 되어 생존하는 것은 인류의 조상 사피엔스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다.


편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편의 긍정적인 표현은 관계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관계라는 긍정성보다 편이라는 부정성이 더 크게 작동한다. 그 이유는 반복되는 치킨게임으로 인해 관계와 편이라는 사회의 이면이 균형 있게 작동할 기회를 늘 잃어 왔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마을을 중심으로 관계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있어 왔다. 마을공동체, 마을교육공동체, 커뮤니티 케어 등... 그런데, 평균 매년마다 열리는 선거라는 치킨게임이 마을이라는 현장에서 관계의 복원을 '일상적'으로 방해한다. 우리는 알량한 관계보다 정치적 신념이 더 중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긍정적인 관계가 부정적인 편으로 나뉘고, 정치적 견해를 둘러싼 이견과 이견이 성장이 아닌 서로의 발목을 잡는 투쟁의 과정을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지속해 왔다. 그중 하나...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촛불혁명은 혹시 기관차와 소형차가 맞붙은 치킨게임이 아니었을까? 소형차는 기관차에 부딪혀 박살이 났지만, 여전히 그 잔해를 부여잡고 있는 사람들은 언젠가 자신의 차를 박살 낸 기관차를 박살 낼 또 다른 치킨게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치킨게임은 크든 작든, 게임의 승자와 패자를 모두 피해자로 만드는 무모한 게임이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포기할 수도 없으니 대략 난감할 뿐이다.  


셋째,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혹시 누군가의 큰 그림은 아닐까?
앞에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실드를 친 이유는 이 세 번째는 지극히 드라마적 상상이기 때문이다. 혹시 2017년 6월 tvN을 통해 방영된 “비밀의 숲”이라는 드라마를 기억하는가? 내용이 하도 복잡해 제대로 스토리를 기억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본에 의해, 그리고 정치에 의해 검사로서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 온 이창준 검사는 그 모든 것을 되돌리기 위해 한 장의 유서를 쓰고 자신의 몸을 던진다.

문화 콘텐츠를 통한 대리만족은 현실을 견디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대한민국이 무너지고 있다. 지금 현실은 대다수의 보통사람은 그래도 안전할 거란 심리적 마지노선마저 붕괴된 후다. 사회 해체의 단계다. 19년… 검사로서 19년을 이 붕괴의 구멍이 바로 내 앞에서 무섭게 커가는 걸 지켜만 봤다. 설탕물밖에 먹은 게 없다는 할머니가 내 앞에 끌려온 적이 있다. 고물을 팔아 만든 3천 원이 전 재산인 사람을 절도죄로 구속한 날도 있다. 낮엔 그들을 구속하고 밤엔 밀실에 갔다. 그곳엔 말 몇 마디로 수천억을 빨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고 난 그들이 법망에 걸리지 않게 지켜봤다. 그들을 지켜보지 않을 땐 정권마다 던져주는 가이드라인을 충실히 받아 적고 이행했다. 우리 사회가 적당히 오염됐다면, 난 외면했을 것이다. 모른 척할 정도로만 썩었다면, 내 가진 걸 누리며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내 몸에서 삐걱 소리가 난다. 더 이상 오래 묵은 책처럼 먼지만 먹고 있을 순 없다. 이 가방 안에 든 건 전부 내가 갖고 도망치다 빼앗긴 것이 돼야 한다. 장인의 등에 칼을 꽂은 배신자의 유품이 아니라 끝까지 재벌 회장 그늘 아래 호의호식한 충직한 개한테서 검찰이 뺏은 거여야 한다. 그래야 강력한 물증으로서 효력과 신빙성이 부여된다. 부정부패가 해악의 단계를 넘어 사람을 죽이고 있다. 기본이 수십, 수백의 목숨이다. 처음부터 칼을 뺐어야 했다. 첫 시작부터…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조차 칼을 들지 않으면 시스템 자체가 무너진다. 무너진 시스템을 복구시키는 건 시간도 아니요, 돈도 아니다. 파괴된 시스템을 복구시키는 건 사람의 피다. 수많은 사람의 피… 역사가 증명해 준다고 하고 싶지만 피의 제물은 현재 진행형이다. 바꿔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이든 찾아 판을 뒤엎어야 한다. 정상적인 방법으론 이미 치유 시기를 놓쳤다. 더 이상 침묵해선 안 된다. 누군가 날 대신해 오물을 치워줄 것이라 기다려선 안 된다. 기다리고 침묵하면 온 사방이 곧 발 하나 디딜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이다. 이제 입을 벌려 말하고, 손을 들어 가리키고, 장막을 치워 비밀을 드러내야 한다. 나의 이것이 시작이길 바란다. (비밀의 숲, 이창준 검사의 유서)

윤석렬 검찰총장도, 조국 법무부장관도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했다. 만약 이 모든 수순이 검찰 개혁을 위한 문재인 대통령의 큰 그림이었다면? 사실이라면 소름이 돋을 일이고, 사실이 아니라면 윤석렬을 검찰총장에 임명한 문재인 대통령의 인사 패착이다.

우린 검사야. 뇌물을 받기도 하고, 접대를 받기도 하지. 하지만 우린 검사야.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단죄를 내려야 하는 부류들과 다르다는 믿음. 아무리 느슨해져도 절대 타인을 해치지 않는다는 믿음.

내가 너무 순진할 걸까? 아니면 그저 대리만족을 해야 할 드라마에 지나친 감정 이입을 하고 있는 것일까? 피 튀기는 치킨게임을 바라보며 윤석렬 검찰총장이 "비밀의 숲"에 등장하는 이창준 검사였으면 좋겠다는 낭만적인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그래서 예로부터 TV를 바보상자라고 했었나 보다. (@back2ana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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