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백수 채희태 Oct 11. 2019

AI와 함께살기 2

제4의 물결, 인공지능과 문명

미국의 저명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1980년 그의 저서 『The Third Wave』를 통해 제1의 물결인 농업혁명과 제2의 물결인 산업혁명에 뒤를 이어 제3의 물결인 정보혁명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제3의 물결에 대한 주장이 있고 채 40년이 되기도 전인 2016년, 우리는 제3의 물결에 이은 제4의 물결을 이야기하고 있고, 그 주인공은 인공지능이 될 것이라고 강하게 믿고 있는 듯하다.


약 45억 년이라고 알려진 지구의 역사 속에서 약 250만 년 전에 등장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이어 호모 에렉투스, 호모 솔로엔시스, 네안데르탈인 등 다양한 인류의 조상들이 존재했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현생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은 약 20만 년 전에 등장한 호모 사피엔스다.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가 약육강식의 자연 생태계 속에서 이룩한 제1의 물결인 농업혁명은 약 1만 년 전에, 자본주의의 토대가 된 제2의 물결인 산업혁명은 18세기 중반에, 정보를 활용하는 인간의 무한한 능력에 주목한 제3의 물결, 정보혁명은 앨빈 토플러의 주장에 따르면 20세기 중반 즈음에 시작되었다.

제1의 물결인 농업혁명과 제2의 물결인 산업혁명, 그리고 제3의 물결인 정보혁명을 나누는 가장 큰 기준은 생산 수단과 생산 방식의 변화이다. 농업혁명 이전에 인류는 수렵과 채집을 하며 먹을 것을 찾아 떠돌았다. 약 1만여 년 전 밀의 재배를 시작으로 인류는 농업이라는 새로운 생산 방식을 통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 곳에 정착하며 안정적으로 개체수를 늘려나갔고, 생산성의 확대에 따른 잉여생산물의 소유에 따라 계급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18세기 중반에 시작되었던 산업혁명은 인류의 생산 방식을 농업에서 공장 중심의 산업으로 바꾸어 놓았다.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의 공통점은 생산성의 확대를 도구에 의존(By Material)했다는 것이다. 석기에서 청동기로, 청동기에서 철기로 도구가 바뀔 때마다 농업 생산성은 크게 향상되었다. 산업혁명 또한 기계의 발전이 생산성 확대를 견인했다. 앨빈 토플러가 제3의 물결로 정보혁명을 주장한 이유는 생산성 확대의 주요인이 도구에서 도구를 활용하는 인간의 정보 능력(Thru Human)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개인용 컴퓨터인 PC의 보급에서 시작해 인터넷을 통한 전 세계 정보망의 연결, 휴대폰과 네트워크의 창의적 결합을 통해 등장한 스마트폰 까지…. 최근 몇십 년 사이에 벌어진 급격한 문명의 발전은 정보를 창의적으로 활용한 인간의 능력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서 혹자는 최근의 정보 혁명을 중세 암흑기에 종말을 고하고 근대 사회로의 길을 열었던 르네상스에 빗대 제2의 르네상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인류의 조상인 사피엔스가 농업혁명을 일으키기까지 약 20만 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렸다면, 농업혁명 이후 산업혁명을 일으키는 데는 20만 년의 20분의 1인 1만여 년밖에 걸리지 않았고, 산업혁명이 있은 지 불과 200여 년 만에 정보혁명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 정도 변화의 속도라면 제4의 물결이 아니라 내일 당장 제5, 제6의 물결이 밀어닥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힘도 그다지 세지 않고, 그렇다고 다른 동물을 압도할 정도의 덩치를 가진 것도 아닌 유인원의 한 종인 사피엔스가 어떻게 지구의 지배자가 되어 자연 생태계의 꼭대기에 위치하게 되었을까?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인간의 가장 큰 능력을 수없이 많은 사람들과 집단을 이룰 수 있는 특유의 관계 능력에서 찾는다.


만일 수천 마리의 침팬지를 천안문 광장이나 월스트리트, 바티칸, 국회의사당에 몰아넣으려 한다면 그 결과는 아수라장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장소에 정기적으로 수천 명씩 모인다. 인간은 교역망이나 대중적 축하행사, 정치제도 등의 질서 있는 패턴을 함께 창조한다. 혼자서는 결코 만들 수 없었던 것들을 말이다. 우리와 침팬지의 진정한 차이는 수많은 개인과 가족과 집단을 결속하는 가공의 접착제에 있다. 이 접착제는 인간을 창조의 대가(大家)로 만들었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중)


18세기 중반 산업혁명을 통해 확산된 자본주의는 시장과 경쟁의 논리를 앞세워 인간이 지구를 지배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능력인 ‘관계’를 무력화시키고 있다. 자본주의의 고질적 모순인 과잉생산으로 인한 경제공황을 막기 위해서는 시장이 끊임없이 확장되어야 한다. 그래서 더 넓은 시장을 차지하려는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이 시작되었고, 두 차례의 참혹한 세계대전을 치렀으며, 미래 가치라는 거품을 현실의 소비로 치환하기 위해 금융자본이 등장하게 되었다. 나아가 지금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매우 소비적이고 시장 중심적인,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매운 독특한 세계(채사장,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에 살고 있다.

시장의 확대가 물리적으로 유한할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 과잉생산에 의한 공황을 막기 위해 자본주의가 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는 ‘과소비’와 ‘중복 소비’이다. 매년 새로운 기능을 탑재한 최신 스마트폰이 ‘과소비’를 조장하고 있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등장하는 새로운 디자인의 옷과 신발은 백화점 매장의 진열대에서 ‘중복 소비’를 부추기고 있다. 그래서 ‘유행’과 ‘대중매체’와 ‘광고’는 시장의 확대를 위한 문화적 첨병이다. 소비라는 마약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진 우리는 과거에는 관계를 통해 해결해 왔던 대부분의 일들을 이제는 시장을 통해 해결한다. 감정노동의 창시자로 알려진 ‘앨리 러셀 혹실드’는 저서 『나를 빌려드립니다』에서 소비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관계’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발하고 있다.

컴퓨터와 누가 더 연산을 잘하는지 대결하는 바보가 있을까?  ‘관계’를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인간을 압도할 수 있는 능력과 잠재력을 가진 인공지능을 활용하거나 또는 맞서야 할지 모르는 인류가 인공지능 시대를 준비하는 가장 현명한 전략은 인공지능과의 경쟁이 아닌 차별화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인류는 경쟁의 방식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다. 만약 인류가 인공지능과 경쟁이 아닌 차별화를 통해 미래를 디자인하고 싶다면, 인간은 경쟁을 멈추고 오늘날의 인류를 있게 한 인간의 가장 핵심적인 능력인 ‘관계’를 복원해야 할 것이다.


3. 小結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2014년 12월 2일 영국 BBC와의 회견에서 “지금까지 개발된 초보적 인공지능 기술이 매우 유용하다는 걸 이미 입증했지만 인간에 필적하거나 능가하는 수준의 인공지능 개발에는 두려움을 느낀다”고 털어놨다. 그는 “인공지능은 스스로를 개량하고 도약할 수 있는 반면, 인간은 생물학적 진화 속도가 늦어 인공지능과 경쟁할 수 없고 대체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8일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에 올린 글에서는 “기술발전이 불평등을 더욱 가속시키고 있다”며 “로봇보다 자본주의가 더 무섭다”고 말했다.

인공지능이 1818년 영국의 한 소녀의 상상에서 시작되었듯, 현재 인류가 누리고 있는 과학문명 또한 그 시작은 터무니없는 상상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상의 힘은 단지 과학문명의 모티브를 제공한 것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한 번 ‘상상’해 보자. 중세 봉건시대 인간은 신으로부터 부여된 계급의 존재를 상상 속에서 인정했기 때문에 누군가는 군림하고, 또 누군가는 지배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겠지만, 21세기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시민들은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것은 계급이 아니라 인권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사실 계급이나 인권은 모두 인간의 집단적 상상의 산물이다. 그뿐인가? 이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제도, 관습, 질서, 통틀어서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문화’야 말로 인간의 상상 그 자체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 속에서 하는 인간들의 집단적인 상상, 즉 소셜 픽션(Social Fiction)이 시장과 경쟁으로  인해 무장해제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복원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다. 상상의 관성이 향하는 방향에 따라 인공지능은 인간의 친구가 될 수도, 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인공지능이 만들어 갈 미래는 비관적인 동시에 낙관적이다.


애초에 태양계에 위치한 초록별, 지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닌 자연이었다. 약 1만여 년 전, 밀의 재배로부터 시작된 농업혁명은 이전까지 수렵과 채집을 하며 먹을 것을 찾아 떠돌던 인류를 한 곳에 정착시켰고, 인간은 농업의 발전을 위해 자연의 주기적인 변화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자연에 속해 있으면서 자연을 숭배하던 ‘인간’이 농업을 통해 얻는 경험을 기록하고 축적할 수 있게 되면서 역사시대가 시작되었고, 이 세계에 대한 헤게모니가 인간에게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고대 그리스는 많은 수학자와 철학자들을 배출했다. 하지만 중세시대에 접어들면서 그 주도성을 ‘신’(사실은 신을 앞세운 인간)에게 넘겨주었고, 1,000년이 훌쩍 지난 후에야 르네상스를 통해 다시 ‘인간’이 세상을 주도하게 되었다. 부패한 신의 대리전쟁인 십자군 원정과 르네상스를 통해 발생한 도시국가의 중산층 시민들이 성장하여 브르주아 혁명을 일으켰고, 그렇게 등장한 자본주의에 의해 인간의 주도성은 다시 ‘자본’(사실은 자본을 앞세운 인간)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낳았다.

자본에 의한 문명의 발전이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그 안에서 인간의 정체성인 ‘인간성’ 또한 빠르게 파괴되어 가고 있다. ‘관계’에 의한 인간의 잠재력과 면역력이 그 어느 때보다 떨어져 있는 21세기 신자유주의 시대에, 인공지능의 부상은 인류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인간의 창조적 능력을 복사해 만든, 그래서 인간과 가장 유사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인공지능과 경쟁을 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능력인 ‘관계’의 복원을 통해 지금까지 그닥 중요하지 않게 여겨 왔던 ‘인간성’을 되찾을 것인가?” 그 답은 인공지능이 아닌 ‘인간’만이 찾을 수 있다. (@back2analog)

매거진의 이전글 AI와 함께살기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