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공과 늘공이 지킨 나무

채희태의 어공일기 #001

by 낭만박사 채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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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공이라는 말이 있다. 어쩌다 공무원이 된 민간인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늘공은 자격시험을 치르고 공무원이 된 정식 관료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이 둘의 관계는 서로 다른 정체성으로 인해 대립적 관계에 놓여 있지만, 둘이 협력할 수만 있다면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할 수도 있다.


구산동도서관마을과 구산보건지소 사이에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솔직히 나무 이름도 모른다. 원래 이 나무는 구산동 도서관마을과 구산보건지소를 설계할 때 잘려 나갈 운명이었다. 2013년인가? 난 구산동도서관마을을 제안하고 건립 관련 회의를 하며 누군가의 추억이 묻어 있을 이 나무를 살렸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보건지소 설계를 다시 해야 할 상황... 한낱 어공 정책보좌관의 주관적 취향으로 피 같은 세금을 낭비할 수는 없는 일... 잠시 옮겨 심었다가 구산동도서관마을 앞마당에 다시 옮겨 심을 수는 없겠냐고 했더니 비용도 비용이고, 나무가 산다는 보장도 없다고 했다. 난 그냥 포기했다. 나 보고 고집이 세다고 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데, 사실 난 고집이 없다. 포기도 빠른 편이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어떻게 안 되는 걸 되게 하라고 무대뽀로 밀어붙이겠는가!


며칠 뒤 같이 회의를 했던 건축과 영선팀의 이범식 주무관이 나를 찾아왔다. 나무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보건지소 설계를 바꾸지 않고 방향만 조금 틀면 될 거 같다고...

그리하여 이 나무는 누군가의 추억과 함께 그 자리에서 계속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아파트 하나 짓겠다고 나무뿐만 아니라 추억을 송두리째 포크레인으로 밀어버리는 세상에 그냥 흘릴 수도 있는 정책보좌관의 체념에 귀 기울여 준 이범식 주무관에게 뒤늦게나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2016년 내가 설시굑청에 있을 때 서대문으로 발령이 나 은평을 떠났고, 지금은 강서구청으로 옮겼다는 연락을 받았다. 최근 들어 부쩍 괜찮은 기술직 공무원들이 강서로 가는 것 같다. 강서구에 기술직에게만 주는 꿀이 있는 게 분명하다.

8채의 집을 이어 만든 구산동 도서관마을, 최초 아이디어 제안은 내가 설계는 오즈의 최재원 소장 작품이다.

그 인연으로 이범식 주무관과는 간간이 서로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부쩍 이범식 주무관의 선글라스와 그 해맑은 미소가 아른거린다. 나의 무심이 지나쳤고, 바람도 서늘해졌다는 뜻일 게다. 오늘은 오랜만에 안부 전화나 함 해야겠다. 강서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누가 괴롭히는 사람은 없는지... 가끔 내 생각도 하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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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8년 10월 23일 개인 블로그(https://www.back2analog.kr/421)에 올렸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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