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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Apr 08. 2020

랜덤 민주주의

대의 민주주의가 점점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 그 징후는 촛불혁명으로 촉발된 동시에 드러났다. 가장 큰 이유는 대의제가 다양성을 ‘대의’하지 못하고 단지 ‘수렴’하는데 그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삶에 고단한 모든 사람이 직접 민주주의를 외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생계를 제쳐놓고 참여의 광장에만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선출이 가지는 장점이자 한계는 대의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다수의 선택을 통해 대의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지만, 동시에 그 자격으로 인해 선출된 권력은 선출한 사람들의 다양성이 아닌 선출된 자신을 대의한다. 그러니 투표를 통해 선출된 대표, 국회의원이 투표한 나의 생각을 대의해 줄 것이라는 기대와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은 정신 건강에 유익할 뿐만 아니라 정치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고, FTA를 받아들이자 노무현 대통령에게 투표한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자신의 신념을 대의하지 않는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했다. 지나고 보니 매우 무책임한 비난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대의 민주주의가 가지는 한계를 알려고도,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지고 않은 채 편하게 권한과 책임을 대의된 권력에게 전가했을 뿐이다.


선출된 권력이 선출한 사람들을 대의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이 ‘운’ 보다는 ‘실력’과 ‘노오력’으로 선출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 선출되기까지 들여야 하는 물리적 노력과 심리적 고통이 적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선출된 권력은 투표 행위가 대의가 아니라 위임이라고 착각한다. 선출직이 되기 위해선 또 ‘선거공학’이라고 하는 오로지 경험으로만 터득할 수 있는 공식도 익혀야 한다. 그래서 나처럼 훌륭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도 감히 선출직이 되고자 하는 엄두를 내지 않는다. (이 부분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없겠지? ㅋㅋ)


대의 민주주의의 또 다른, 그리고 매우 심각한 부작용은 다수의 선택을 받아 대의의 자격이 주어졌다고 하더라고, 그 선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대의의 자격을 지속적으로 부정한다는 것이다. 이럴 거면 투표를 왜 했나 싶을 정도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나도 그러한 부작용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나는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태극기에 기댄 열성적인 어르신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문재인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에겐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비난할 자격이 없다. 나 또한 상대적으로 그러한 비난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말 나온 김에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짚어보자. 총선, 지선, 대선, 그리고 보선까지 평균 2년에 한 번 꼴로 열리는 선거는 곁이었던 관계를 편으로 분리한다. 정치적 신념의 편 가르기는 부부, 친구, 그리고 부모와 자식 사이를 가리지 않고 파고든다. 그리고 그 축적된 후유증은 나아가 마을공동체를 파괴하는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정치적 선택을 단지 취향으로 ‘인정’하기에는 우리가 걸어온 역사의 골이 얕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시대 변화의 속도가 세대 간 이질성을 증폭시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결론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제비로 대표를 선출하는 “랜덤 민주주의”의 도입을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대표를 어떻게 제비로 뽑냐고?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의 역사를 따져 본다면 내 주장이 황당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한민족 반만년의 역사 중 투표로 대표를 선출하기 시작한 것은 고작 70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난 (차라리?) 제비로 선출된 국회의원의 ‘평균’ 역량이나 도덕성이 지금까지 투표에 의해 선출된 국회의원보다 못할 것이라고 감히 확신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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