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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Apr 19. 2020

자퇴를 결심한 딸에게...

나쁜 아빠 #1

그것이 도피든, 아니면 도전이든 딸은 이제 사회와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나 오롯이 딸이 판단하고 책임져야 하는 길에 들어선 것 같구나.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서로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남겼던 감정의 줄다리기를 하기도 했지만, 아빠는 아빠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그저 부모로서 자식이 더 쉽고 편한 길을 선택해 주었으면 하는 구질구질한 사랑의 표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아빠의 마지막 잔소리라고 생각하고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옛날 언젠가처럼 읽지 않고 찢어버려도 뭐 할 수 없고...


1. 용감한 유전자와 비겁한 유전자

얼마 전에 잠깐 얘기를 나누었던 주제다. 인류가 가지고 있었던 용감한 유전자는 문명 개척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졌다고 한다. 나무 위에서 살았던 사피엔스가 나무 밑으로 내려올 수 있었던 이유는 용감한 유전자를 가진 사피엔스가 비겁한 유전자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무 밑을 개척했기 때문이라고... 그 과정에서 좋게 봐서 용감하고, 나쁘게 말해 무모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던 사피엔스는 대부분 나무 밑에 살고 있었던 무시무시한 맹수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사피엔스는 나무 아래에서 살기 시작해 수십만 년을 대부분 미개한 상태로 지냈다. 소위 문명이 시작된 지는 채 만 년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불과 몇 백 년 전까지도 해도, 아니 지금도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약탈의 시기는 계속되고 있다. 그 약탈과 전쟁의 과정에서 선두를 지켰던 대부분의 용감한 유전자 역시 죽임을 당했고, 뒤에 숨어 있던 유전자들이 비굴하게 살아남아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있다.


비겁하고 나약한 인류가 서로에게 의존하기 위해 만든 시스템이 바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소위 관계는 비겁하고 나약한 인간들의 안전장치인 셈이다. 서로의 안전을 위해 만든 관계 안에서 더 용감하거나 덜 용감한 유전자는 사실상 없다. 더 비겁하거나, 덜 비겁한 유전자만 있을 뿐이다. 가끔 남아있는 용감하거나 또는 무모한 유전자는 나약한 인간들이 만든 안전한 시스템을 부정한다. 지금의 딸처럼...


 

2. 관계 속으로 숨다.

아빠는 대학 때 학생운동 언저리를 서성였다. 맨 앞은 용기가 없어서 나서지 못했고, 맨 뒤는 쪽 팔려서 피했다. 거리에서 데모를 하다가 전경들에게 쫓길 때 가장 안전한 방법은 혼자 더 빨리, 더 멀리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에 있는 군중 속으로 숨는 것이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그렇고, 또래 집단이 관계를 맺는 학교가 그렇고, 이웃들이 살고 있는 동네가 그렇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 일반화된 ‘회사’는 비겁한 유전자가 생존을 넘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만든 사회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전지전능해 개인의 힘으로 이익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굳이 다른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며 구질구질하게 관계로 엮일 필요가 없다. 사장은 직원들이 있어야 회사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으며, 직원들은 회사가 있어야 노동의 대가를 받아 다른 다양한 관계들을 유지할 수 있다. 그렇게 대부분의 비겁한 유전자들은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관계 시스템 안에서 생활한다.


사실 그것이 좋아서라기 보다는 그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해 관계를 맺고 있다고 의식한다면 관계가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을까? 문명의 역할 중 하나는 생존에서 시작해 효율적인 이익을 추구하며 정교해진 관계를 우아하게 치장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가부장제는, 장유유서는, 그리고 수직적으로 형성된 모든 계층과 계급은 그렇게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화의 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3. 꼰대는 '생각'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

어느 시대건 인간이 스스로 완벽한 존재라고 생각했다면 문명은 그 시대, 그 모습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인간이 비겁함을 보완하기 위해 관계를 맺어 왔던 것처럼, 부족함을 인정한 인류는 과거 인류가 이룩한 문명의 결과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며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완벽한 신이 아니라 언제나 부족한 존재였기 때문에 과거와 다른 현재를 살 수 있고, 미래 또한 현재와 다를 것이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다양한 관계 안에서 힘이 있는 사람들은, 그 역시도 덜 비겁한 존재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더 비겁한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일방적으로 권력을 행사해 왔다. 뇌과학자들은 권력이, 아무리 사소한 권력이라고 할지라도 뇌의 공감 능력을 쇠퇴시킨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모방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감정을 모방하는 것이 바로 공감이다. 권력은 공감 능력을 쇠퇴시키고, 공감 능력을 상실한 사람은 자신의 생각만을 주장하는 소위 '꼰대'가 된다.


꼰대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수용하는 '태도의 차이'가 그 기준이 된다. 꼰대는 진보와 보수,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를 떠나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거나, 다른 생각을 수용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부도덕한 보수와 싸우는 과정에서 꼰대스러운 진보가 등장했고, 가부장제와 싸우는 과정에서 일부 여성은 혐오를 앞세운 꼰대가 되어가고 있으며, 나이를 권력처럼 휘둘러온 어른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해온 아이들도 자신의 생각과 다른 모든 것을 부정하는 이른바 어린 꼰대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내가 현재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자신과 다른 생각을 대하는 ‘태도'이다.


기성세대로서 아빠는 딸보다 더 많은 시간을 살아왔지만, 단지 더 많이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아빠의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경험이 아닌 가능성의 기준으로 본다면, 아빠의 죽은 경험은 딸이 가진 살아있는 가능성에 비해 오히려 하찮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다만, 아빠가 딸의 가능성을 존중하는 것처럼, 딸도 세상의 모든 경험을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이 가진 짧은 경험이나, 불확실한 가능성만 옳다고 확신하는 ‘어린 꼰대’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빠가 딸에게 하고 싶은 마지막 잔소리는... 여기까지!!!


세월호 6주기인 2020년 4월 16일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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