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미향 파동을 대하는 제3의 관점...
인간이란 어항 속 물고기이며
어항 속 세상만을 정밀하게 기록하고 나서는
이것만이 세계의 전부고 진리인 줄 안다.
- 고바야시 히데오 -
입장 속에 갇혀 있을 땐 보이지 않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알 수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소위 입장이라는 생태계가 작은 어항인지, 조각난 하늘만 허락된 우물인지, 아니면 끝도 보이지 않는 바다인지... 당파성의 시대를 살아온 인류가 입장을 떠난다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벗어나는 것처럼 매우 위험한 일이다. 입장에서 벗어나려면 가장 먼저 기회주의자나 개량주의자라는 비판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게 어때서? 우리는 문화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동등하게 1표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민주주의에 합의했거나, 합의당했다.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함의가 적지 않다. 모두 1/n로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n/n을 지향하는 꼰대가 설 자리가 점점 더 사라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우월함을 기준으로 꼰대라는 방석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다. 혹시... 나도?
보수를 향하고 있는 진보와, 진보의 탈을 쓴 보수가 서로 '만수산 드렁칡'처럼 엉켜 있는 이 시대에 전통적인 개념의 진보와 보수는 사라졌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진보는 현재의 체제를 부정하는 자다. 그래서 이렇게 아규(argue)한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보수는 체제를 유지하려는 자다. 반대로 진보를 이렇게 진정시킨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이 시대 진보와 보수는 그저 관성으로만 존재한다. 전지전능한 자본주의는 놀랍게도 진보와 보수 모두를 시대의 이해 당사자로 만들었다. 지금의 안락함을 포기하고 폐허 위에 새로운 세상을 건설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할 수 있는 사람은 물리적으로도 얼마 되지 않는다. 모름지기 그러해야 한다는 관성만 존재할 뿐...
그렇다면 관성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진보와 보수를 비판하기 전에 그 속성에 대해 먼저 진단해 보자. 이 글은 조국에 이어 윤미향 파동(?)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을 지켜보며 쓴 글이라는 사실을 미리 밝혀 둔다.
제목에서도 썼듯이 진보는 불나비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못 먹어도 “go”를 외치고,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불 속으로 뛰어든다. 반면 보수의 속성은 도마뱀이다. 생존하기 위해 스스로 꼬리를 잘라내고, 잘라낸 꼬리에 대중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능력이 탁월하다. 경계가 허물어진 세상 속에서 진보나 보수나 모두 억울한 일 투성이다. 먼저 그 억울함에 대해 살펴보자.
진보 불나비는 똥물에 살고 있는 보수 도마뱀과 싸우다 똥물을 뒤집어쓴다. 보수와 싸우는 과정에서 경계가 옅어져 자발적으로 똥물을 뒤집어쓰는 경우도 없지 않다. 어렸을 적 푸세식 화장실을 사용해 본 경험이 있는 필자는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심한 똥냄새도 시나브로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진다는 사실을... 그래서 대중들은 도마뱀이 냄새나는 똥물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문제는 진보 불나비가 뒤집어쓴 똥물이다. 대중들은 늘 익숙하지 않은 것에 반응한다.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거리가 안되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진보의 관성으로 살아온 불나비는 똥물과 싸우다 똥물을 뒤집어쓴 상황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똥물 속에서 살고 있는 도마뱀이 튀긴 똥물을 뒤집어쓴 불나비는 그저 억울하다며 똥물을 안고 줄줄이 불 속으로 뛰어든다. 똥물 속에 서식하고 있는 도마뱀은 그 모습을 보며 “아싸, 가오리”를 외친다.
다음은 보수의 억울함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억울한 보수 도마뱀은 바로 40년 전 광주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이다. 전두환은 오래전 자신의 억울함을 담아 이렇게 이야기했다.
왜 나만 갖고 그래~
전두환도 한때는 도마뱀의 몸통이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잘려나간 꼬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 꼬리가 살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똥물을 튀기면 튀길수록 도마뱀은 더 안전하게 자신의 일에 몰두할 수 있다. 꼬리가 된 전두환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다. 도마뱀의 몸통은 여전히 똥물 속에서 자알 살고 있는데, 대중들은 몸통에는 관심이 없고 꼬리가 되어버린 자신한테만 뭐라고 하니 어찌 억울하지 않겠는가!
2017년 우리는 적폐 청산이라는 깃발을 치켜들고 촛불 혁명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박근혜라는 꼬리 하나를 겨우 잘라냈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 열심히 계산기를 두들겼을 것이다. 자신의 몸통을 보전하기 위해 꼬리를 지킬 것인지, 아니면 잘라낼 것인지... 그래서 촛불 혁명은 시민의 승리일까, 아니면 보수 기득권 세력의 계산의 결과일까?
사실 진보나 보수나, 먹고사는데 바빠 세상사에 관심이 없는 대중이나, 나처럼 입장에서 벗어나려고 기를 쓰는 개량주의자나 모두 자본주의라는 똥물에서 살고 있기는 매한가지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 나왔던 정도전의 대사를 패러디하면 이렇다. 자본주의라는 똥물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살고 있다. 똥물을 튀기는 자, 그 똥물에 맞는 자, 그리고 똥물이 만들어낸 파도를 타는 자... 누구나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라는 똥물 속에서 생활하다 보니 모두 자신의 몸에서 나는 똥냄새에는 익숙해졌다. 그 어쩔 수 없음이 과거에는 생존의 영역이었지만, 지금의 이익의 영역이 되었다. 양극화된 사회에서 죽을 수는 있어도 이익을 포기할 수는 없다. 1개의 빵으로 생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넘들이 10개의 빵을 먹고 있다면, 더 많은 빵을 먹기 위해 너도나도 죽음의 레이스에 뛰어든다.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다양한 똥물의 세례를 받는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라는 똥물의 이해 당사자가 되어 왔다.
필자가 보기에 조국에 이어 윤미향 파동의 본질은 우리가 얼마나 똥물에 깊숙이 빠져 있느냐이다. 어떻게 이 냄새나는 똥물의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는데, 서로 누구 똥이 더 굵은지 싸우고 있는 꼴이다. 문제의 원흉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달에 있는데, 서로 그 달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만 비틀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일찍이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죄 있는 자에게 돌을 던지라 하셨으며, 금자씨도 친절하게 말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