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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Jun 22. 2020

페리 코로나(Peri-Covid)시대의 백수

백수의 사회학 #9

Pre Script.

pre-, peri-, post-는 주로 의학 분야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증상에 대한 처방 이전, 치료를 위한 처방의 과정, 처방 이후를 구분할 때 사용하는 접두어다. 지금 인류의 경제, 문화 전반을 흔들어대고 있는 코로나도 본질적으로는 바이러스에 의한 질병이므로 이러한 접두어의 사용이 매우 적절해 보인다.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에서도 노동 시간이 길기로 유명하다. 2007년까지는 늘 부동의 1위를 차지하다가 2008년 멕시코에 1위를 내주었다. 그리고 2015년 다시 정상을 탈환한 후 이듬해에 2위를 기록하다가 2018년 워라밸(work-life balance)이 사회의 트렌드가 되면서 5위로 내려왔다. 그렇게 악착같이 일을 해서일까? 대한민국 경제는 가파르게 성장해 마침내 GDP 규모로는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그러던 중 코로나가 터졌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명실상부 세계를 선도하는 코로나 선진국이 되었다.

필자가 직장에 다닐 때, 필자가 속한 부서의 부서장은 퇴근하기 전에 사무실을 둘러본 후 다음날 자신보다 일찍 퇴근한 직원을 불러 면담을 했다.

요즘 일이 할랑할랑한가?


면담을 마치고 난 이후부터 필자는 아주 급한 일이 아니면 부서장보다 먼저 퇴근한 날이 없었던 것 같다. 그때는 필자도 그렇게 살아야 하나 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백수가 되어 생각해 보니 그게 나를 위해서나, 회사를 위해서나, 나아가 국가를 위해서도 참 바보 같은 짓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 이유를 한번 설명해 보겠다.


첫째, 장시간 노동은 노동의 질을 떨어뜨린다.
삼성이었나? 어떤 직원이 오랜만에 사무실을 찾은 사장에게 자신은 회사를 위해 열심히 야근을 하고 있다고 어필했다가 잘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삼성이 괜히 삼성이 아니다. 사실 8시간 안에 끝낼 수 있는 일을 퇴근 시간 이후까지 하는 사람은 능력이 없는 사람이 맞다. 필자는 부서장과의 면담 이후 퇴근을 늦게 하기 위해 노동의 질을 조정했다. 사실 노동의 질과 시간의 상관관계는 밝혀진 바가 없다. 아카데미 증후군이라는 것도 있다. 비슷한 능력의 두 팀에게 같은 프로젝트를 맡겼는데, 한 팀은 일주일을 주고, 다른 한 팀은 한 달의 기간을 준 후 결과를 비교했더니 크게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한 단계 더 도약하려면 노동의 질을 시간과 연동하는 관성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둘째, 초과근무는 회사의 운영비용을 증가시킨다.
공무원은 야근을 하면 초과근무를 하면 수당이 꼬박꼬박 나온다. 그래서 예전엔 초과근무수당을 챙기기 위해 꼼수를 쓰는 공무원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기업은 초과근무를 하더라도 별도의 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총액임금제를 선택한다. 즉 연봉 계약을 통해 1년 간 해야 하는 모든 노동을 퉁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야근을 하는 직원에게 식대를 지급하지 않는 야박한 회사는 없다. 직원들은 상사에게 찍히지 않기 위해 과잉 노동을 하며, 여름엔 빵빵하게 에어컨을, 겨울엔 온풍기를 틀어가며 회사 비용으로 맛있는 밥도 먹는다. 그 시간에 정말 회사를 위해 노동을 하는지, 쾌적한 환경에서 여가를 즐기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패스트푸드는 음식 앞에 맛이 아닌 ‘패스트’라는 시간이 수식한다. 밥 먹는 시간도 아껴 노동을 하라는 이유로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최근 야근이 금지된 선진국에서는 시간 안에 빨리 정해진 일을 마쳐야 하기 때문에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셋째, 야근은 소비 생태계를 파괴한다.
2019년 혁신교육지방정부협의회 주관으로 소위 교육 선진국이라는 덴마크와 핀란드를 다녀온 적이 있다. 저녁 6시 즈음 코펜하겐 공항에 도착해 숙소로 향하는데, 도로가 한산했다. 현지 가이드는 덴마크는 3시가 퇴근 시간이라 러시아워가 3시라고 설명해 주었다. 2018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달러이고, 덴마크의 1일당 국민소득은 6만 달러로 딱 우리의 두 배다. 덴마크 사람들은 일을 어떻게 하길래 야근도 안 하고, 더구나 3시에 퇴근을 하면서도 우리나라보다 두 배나 잘 살 수 있을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열심히 노동을 해 물건을 만들어 내도 그걸 소비할 시간이 없다면 경제는 돌아갈 수 없다. 직장인들을 밤에도 붙들어 놓으면 퇴근 후 할 수 있는, 특히 대중문화 소비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은 그런대로 유지가 되는데,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는 예술가들이 배를 곯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얼마 전 은퇴 후 귀농을 하신 한국을 대표하는 아나키스트, 박홍규 교수님을 모시고 스터디를 한 적이 있다. 한국사회연찬이라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석학들의 발제를 듣고 토론을 하는 스터디였다. 스터디가 끝난 후 자연스럽게 코로나 이야기가 나왔다. 박홍규 교수님은 딸이 주재원인 남편을 따라 베트남(?)에 가 있는데, 코로나 때문에 재택근무를 하는 남편과 집에서 복작대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코로나 이전엔 아침 일찍 나가 자정이 다 되어서 들어오던 남편이 재택을 하며 일하는 시간이 딱 5분이라는 것이다. 메일 확인하고, 결재하고... 코로나로 인해 학교도 온라인 개학을 했고,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한다. 과장이긴 하겠지만, 우리는 다양한 과학 기술의 발달로 과거보다 더 적은 노동을 통해 많은 효과를 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류가 함께 개척해 온 문명의 결과를 적당히 분배할 수만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백수처럼 살아갈 날도 곧 도래하지 않을까? 하루에 1시간 일하고 나머지는 여가를 누려야 하는 그런 시대 말이다. 갑자기 그런 시대가 들이닥치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백수들은 인간이 해야 할 새로운 노동을 개척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로 여가라는 노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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