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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Jun 24. 2020

백수의 시간은 돈이다!

백수의 사회학 #12

우리는 백수의 시간을 지나치게 함부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백수에게 열정 페이를 요구하는 하늘과 땅이 함께 화낼 짓을 하는 분도 적지 않다. 필자는 얼마 전 평소 알고 지내던 한 선배로부터 전국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하는 정책 평가 심사를 부탁받은 적이 있다. 필자는 거절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일단 승낙을 했다. 그런데 막상 심사를 하려고 보니 일의 양이 장난이 아니었다. 무려 51개의 신청서와 증빙 자료를 검토해야 했다. 주어진 시간도 넉넉하지 않았다. 필자는 마침 찾아온 연휴에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 했다. 백수가 야근이라니... 옆지기에게도 핀잔을 들었다.


“남들 일할 땐 놀더니, 왜 애들 노는 날 일을 해? 돈은 많이 준대?”


돈? 심사비? 아무리 선배라도 일을 시켰으니 돈은 주겠지? 필자는 혹시나 싶어 선배에게 카톡으로 심사비 여부를 물었다. 노동의 대가가 얼마인지 직접 물어보는 건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선배는 심사비는 있지만 액수는 많지 않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필자는 노동의 양과 현재 백수인 필자의 상황을 어필하고 정확한 액수를 물었다. 선배는 액수를 알려주는 대신 공덕을 쌓으라는 황당한 답변을 보내왔다. 헐~

공감, 백퍼~

어쨌든 하기로 했으니 일은 해야 했다. 이틀 동안 51개의 신청서를 읽었다. 처음엔 증빙자료까지 꼼꼼히 챙겨 봤는데, 물리적으로 도저히 심사 마감 시간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아 나중에는 신청서만 빠듯하게 읽었다. 그리고 채점을 하고 심사평을 적어 이메일로 보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서류 심사를 통과한 자치단체와 의원을 대상으로 하는 면접도 있었다. 이틀에 걸쳐 면접 심사를 했다. 거기다 대상 후보지역에 대한 현장 실사까지... 그리고 며칠 후 통장을 확인해 보니 20만 원이 찍혀 있었다. 순간 생각했다.


아, 내 노동의 가치가 이 정도였구나.


심사에 열중하느라 몇 개의 다른 일거리를 거절하기도 했는데, 꼬박 5일을 넘게 일한 결과가 20만 원이라니... 시간당으로 따져 봐도 최저 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액수였다.


노동의 대가를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은 하지만, 그렇다고 필자가 돈만 밝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기꺼이 열정 페이만으로 참여하고 있는 일이 더 많다. 1년 후 있을 행사를 하나 준비하고 있는데, 내가 기획한 홍보 리플릿의 표지에 쓸 사진의 해상도가 너무 낮았다. 필자는 디자이너를 하다가 쉬고 있는 후배에게 혹시 포토샵으로 보정을 해 줄 수 있는지 ‘의뢰’했다. 후배는 기꺼이 해 주겠다고 대답을 했다. 결국 그 후배가 작업한 파일이 쓰이지는 않았다. 필자가 열정 페이로 일을 하고 있다고 그 후배에게까지 열정 페이를 요구할 수는 없었다. 필자는 사비로 그 후배에게 10만 원을 보내 주었다. 내가 겪은 좌절을 같은 백수로 살아가고 있는 후배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비약을 하자면... 회사를 다니고 있는 동안에는 숨 쉬는 시간도 노동 시간에 포함된다. 하지만 백수는 그렇지 않다. 백수에겐 모든 시간이, 선택이, 장소가 바로 돈이고 비용이다. 밖에 나가 분식집에서 라면을 사 먹느냐, 아니면 집을 나가기 전에 고추장에 비벼서라도 밥 한 끼를 때우고 나가느냐는 백수에겐 하늘과 땅 차이다. 그래서 필자는 쌀이 평소보다 빨리 떨어진다는 옆지기의 말을 슬쩍 흘려 들으며, 밖을 나가기 전 무조건 한 끼는 꾸역꾸역 챙겨 먹는다. 프리랜서로 잘 나가는 백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백수는 필자와 비슷하게 자신의 시간이 곧 돈임을 주장하고, 증명하기 위해 살아간다. 그러니 부탁하건대, 제발 백수의 시간을 무겁게 여겨 주시라! 백수에게 시간을 빼앗는 것은 곧 돈을 빼앗는 것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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