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사회학 #21
역사 속에 등장하는 실존인물은 아니지만 일찍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장차 백수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 준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백수, 홍반장이다. 영화의 제목이 참 길다. 우리나라 영화 제목 중 두 번째로 긴 영화 제목이라고 한다. 제일 긴 영화 제목은 좀 끔찍하니 굳이 찾아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홍반장의 앞을 꾸며주는 수식어는 사실 “짱가”라는 70년대 메카닉 만화의 주제가에 등장하는 가사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짜짜짜짜 짜짱가 엄청난 기운이
틀림없이 틀림없이 생겨난다 지구는 작은 세계 우주를 누벼라~
필자가 어렸을 적 들었던 가사는 분명히 ‘누군가에’였다. 그런데, 주제가를 부른 가수의 목소리가 느끼해서였는지, 어린이가 부른 다른 버전의 노래에는 ‘누군가에’가 ‘누구에게’로 바뀌었다. 영화를 감독한 강석범 감독은 72년 생으로 아마 필자처럼 오리지널 짱가 가사의 제목을 기억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무리 촌스럽고 느끼하더라도 우리가 살면서 처음 접한 오리지널리티는 매우 중요하다. 오리지널리티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오리지널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중대한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로보트태권V의 디지털 복원판이다. 제대로 보존이 안 된 로보트태권V의 오리지널 필름을 복원하느라 많은 기술과 시간, 그리고 인력이 동원되었는 것은 필자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1976년 개봉된 후 무려 30년 만인 2007년 재상영된 태권V는 복원판이 아니라 개정판이었다. 가장 실망한 건 성우의 목소리가 다르다는 것이다.
태권V를 사랑하는 필자의 입장에서 그 낯섦이 디지털로 ‘개정’된 태권V의 가치를 떨어뜨렸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사에도 칼질을 했다. 태권V의 조종사 훈이는 자동차를 운전하며 조수석에 탄 영희와 이런 오글거리는 대사를 주고받는다.
영희 : 훈, 오늘 데이트는 즐거웠어.
훈이 : 응, 내가 옆에 있으니까.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대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고등학생으로 알려져 있는 훈이가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지 않는 건 뭐 대한민국 대권도 국가 대표니 그럴 수 있다 치자. 그런데 고등학생 버젓이 자동차를 운전하는 건 범법행위 아닌가? 태권V 조종사에 대한 특권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게 이 장면은 태권V가 등장하기 이전이다. 태권V가 표절했다고 알려져 있는 마징가Z의 조종사 쇠돌이(일본명 카부토 코우지)와 친구들은 그래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 두 번째는 아무리 잘 생기고 태권도 세계 챔피언이지만, 이런 말을 하고도 영희와 계속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게 2020년을 살고 있는 필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였는지 위의 대사는 2007년 개정판에는 다음과 같이 바뀐다.
영희 : 오늘 산책, 정말 즐거웠어.
훈이 : 응, 내가 옆에 있으니까
영희 : 하하하 (ㅠㅠ)
필자는 분명 노영심이 부른 별 걸 다 기억하는 남자일지 모른다. 영심이는 필자의 취향이 아니라 보지 않았지만, 남자 친구 왕경태가 안경을 꼈다는 것 정도는 기억하고 있다. 아직도 초등학교 1년 때 본 “서부소년 차돌이”의 주제가를 부를 수 있으며, 차돌이의 숙적 이름이 ‘빅스톤’이라는 것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마징가Z를 조종하는 비행기인 ‘홉바파일더’를 기억해 그릴 수도 있다. 그런 필자가 설레는 마음으로 딸과 함께 보러 간 디지털 버전의 태권V가 복원판이 아니라 개정판이었다니 그 실망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겠는가? 참고로 필자는 태권V를 주제로 책 한 권을 쓸 자신도 있다. 책을 내주겠다는 출판사가 있다면 말이다.
본격적으로 “홍반장”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깐 짱가 이야기로 다시 돌아와 보자. 필자가 알고 있는 유명한 지인 중 ‘짱가’라는 별명을 가진 분이 계시다. 한번은 그 유명한 분을 직접 대면할 기회가 있어 왜 별명이 짱가인지 여쭤보았다. 사실 나도 짱가를 알고 있음을 어필하여 그 유명한 분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의도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짱가가 국산 토종 로봇이라 스스로 별명을 짱가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짱가의 국적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일본이라고 유튜브 동영상을 증거로 보여 드리니 적잖이 당황을 하셨다. 평생을 짱가로 살아오신 분에게 본의 아니게 동심을 파괴하는 죄를 짓고 만 것이다. 그래서 안 친해졌나? ㅠㅠ
서론은 길게, 본론은 짧게!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등진 김주혁이 연기한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나는 홍반장”의 하루 일당은 무슨 일을 하든 무조건 5만 원이다. 홍반장의 여주, 혜진(엄정화 분)은 홍반장이 사는 동네로 이사를 오며 부동산 중개업자로 처음 홍반장을 만난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집을 수리하러 온 인테리어 업자로 만난다. 엄정화가 무슨 일을 하려고만 하면 그 자리에 일당 5만 원짜리 홍반장이 등장한다. 영화에서 홍반장은 전문가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도 척척 해 내는 신비로운 인물로 그려진다. 결혼을 독촉하는 여주의 아빠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당 5만 원짜리 남친 역할을 하게 된 홍반장은 여주의 아빠와 바둑을 두며 한 수 물러달라는 아빠의 구걸을 천연덕스럽게 물리치고, 프로급 골프 실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경영 용어도 척척 구사하며 여주 아빠의 환심을 산다. 주인공 홍반장을 과도하게 돋보이게 하려는 지극히 영화스러운 설정이지만, 다른 관점으로 보면 홍반장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세계로 나아갔다가 마을로 되돌아온 백수로 볼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부자가 될 수도 있겠지만, 홍반장은 그래 봤자 상대적인 인간의 행복지수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영화 속 홍반장 같은 능력이 없어도 충분히 마을에서 행복한 홍반장으로 살 수 있다. 마을에서 열심히 관계를 맺다 보면 자신에겐 별다를 것 없는 능력이 필요한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힘이 있는 사람은 힘이 없는 사람의 짐을 대신 들어줄 수도 있고, 삶의 경험을 필요한 사람과 나눌 수 있으며, 시간이 없는 사람의 시간이 필요한 어떤 일을 대신 해 줄 수도 있다. 사실 마을은 전문적이고 비싼 그 무엇보다, 덜 전문적이더라도 믿고 일을 맡길 홍반장 같은 사람이 더 필요하다. 모든 분야의 전문가는 모두 각자의 자신에게만 이로운 목표가 있다. 프랜차이즈 빵집의 목표는 이윤을 남기는 것이지 마을과 함께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개인택시를 꿈꾸는 택시기사처럼 본사에 사납금을 낸 후에야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돈을 벌 수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멀리서 오는 택배는 얼굴도 모르는 전문적인 택배기사가 해야 하겠지만, 마을에 믿을만한 홍반장 한 명이 있다면, 마을로 배달되는 모든 택배를 받아 안전하고, 편안한 시간에 택배를 전달해 줄 수도 있다. 만약 마을 사람들과 관계를 축적해 나갈 수 있다면 누구나 얼마든지 행복한 백수, 홍반장으로 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