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마을이 구하고, 마을은 백수가 지킨다!

백수의 사회학 #22

by 낭만박사 채희태

인공위성으로 세계 구석구석을 감시하고 있는 구글도 아니고, 스마트폰으로 개인의 모든 사생활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애플도 아니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직관 능력을 가볍게 넘어버린 인공지능도 아니고, 마을 따위가 과연 세계를 구할 수 있을까? 필자도 마을공동체의 필요성을 이야기할 때마다 늘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지만, 그저 공허한 바람을 담았을 뿐, 진짜 마을이 세계를 구할 거라고는 믿지 않았던 것 같다. 적어도 코로나가 세계를 멈춰 세우기 전까지는 말이다.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생길 수 있는 것처럼 코로나가 가지고 있는 불확실한 공포가 반드시 우리에게 해롭기만 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코로나로 인해 우리는 그동안 세계화라는 거품 속에 가려져 있던 마을의 소중함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진짜 세계를 구하기 위해선 마을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당연하고도 어마어마한 말을 했을까?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라는 말은 1962년에 인도의 나바지반(Navajivan) 출판사가 발간한 『Village Swaraj』라는 제목의 책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널리 알려졌다. 스와라지(Swaraj)는 1906년 인도에서 일어난 반영 자치 운동이며, 힌디어로 자치, 혹은 자기 지배를 뜻한다. 간디는 『Village Swaraj』에서 마을 자치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미래 세계의 희망은 아무런 강제와 무력이 없고, 모든 활동이 자발적인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작고 평화롭고 협력적인 마을에 있다


간디는 인도의 빈곤이 단지 영국의 식민지배 때문이 아니라 산업주의와 기계문명의 논리에 순응하면서 자립과 자치 능력을 상실한 인도 사람들 자신에게 있다고 보았다. 간디의 주장은 시대를 거스르는 중세 보수주의적 경제사상쯤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다. 사실 필자도 간디의 주장이 다소 시기상조였다고 생각한다. 자본의 경쟁이 없었다면, 기계를 앞세운 산업화가 없었다면, 스마트폰과 SNS가 없었다면 여전히 개인은 집단(국가, 민족, 사회)을 가장한 기득권 계층의 이익을 위해 생산되고 있는 정보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간디의 사상은 지나친 세계화로 마을의 관계가 파괴되고, 경쟁이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는 이 시대에 오히려 더 설득력을 갖는다.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던 윤태호의 웹툰, “미생”의 한 에피소드에서 비리에 연루되어 회사에서 쫓겨나게 된 최영후 전무는 오상식 차장을 만나 이렇게 고백한다.


모두가 땅을 볼 수밖에 없을 때, 구름 너머 별을 보려는 사람을 임원이라 하더군. 난 구름에 오르기 위해서는 땅에서 두 발을 띠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 두 발을 땅에 딛고도 별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하지만 이번에 확실하게 깨닫게 됐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원하는 임원이란 두 발을 땅에 굳게 딛고서도 별을 볼 수 있는 거인이란 걸... (드라마, “미생” 19화 중)


윤태호의 웹툰, "미생"의 한 장면


우리가 나고 자란 작은 마을은 나무로 따지면 뿌리라고 할 수 있다. 날치가 물 위를 날 수 있는 건 물을 차고 오르기 때문이다. 빙산의 일각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위해선 몇 배나 더 큰 덩어리가 수면 아래에서 받치고 있어야 한다. 세계가 지금처럼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면 코로나는 지역의 풍토병에 그쳤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세계화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아시아의 농업경제학자 ‘원톄쥔’을 비롯한 세계의 많은 미래학자들은 지역을 무시한 세계화에서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세계화,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구름 위에서 별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발이 지면에서 떨어지면 안 된다. 그동안 구름 위에서 별을 살핀 사람들은 이제 땅 위로 내려와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이제 세계를 구할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는 마을을 한번 살펴보자. 마을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마을의 모습도 지역에 따라 다르다. 2020년 6월 현재 한국 인구(약 5천2백만 명)의 절반 이상(50.17%)인 약 2천6백만 명이 대한민국 전체 면적(99.720㎢)의 11.8%(11,745㎢)인 수도권에 살고 있다. 숫자가 너무 크면 현실성이 없다. 10개의 교실이 있는 학교에 100명이 다니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1개의 교실에는 50명의 학생들이 바글바글하게 몰려 있고, 나머지 9개 교실에는 평균 5~6명이 있는 꼴이다.

한국으로 좁혀 생각해 보면, 서울이 세계고, 지방은 마을이다. 서울에는 젊은 사람들이 드글드글하고, 그들을 위한 온갖 서비스들이 차고 넘치는 반면, 마을에는 노쇠한 어르신, 출산과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 학교를 다녀야 하는 아이들만 남겨진다. 최소한의 마을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복지, 교육, 의료 기관이 있고, 영세한 자영업자로 이루어진 시장도 형성이 되어 있지만, 그 소중한 마을의 일자리는 대부분 다른 마을에서 온 사람들로 채워진다. 세계로 나가지 못한 채 마을에 남아 있다는 것은 그다지 자랑스러운 일이 못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을에는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두려워 집에 있거나, 후드나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삼선 슬리퍼를 끌고 마을을 배회하는 백수들이 살고 있다.

필자도 익히 경험한 바 있다. 평일 낮에 평소 알고 지내던 이웃을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는 것이 얼마나 곤혹스러운지를... 뭔가 필자의 사정에 대해 설명을 하고 싶은데, 또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닌 것이 엘리베이터에서 서로 눈이 마주친 것 외에는 특별한 관계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로만 마을이 세계를 구할 것이라고 떠들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마을에 있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 한다. 마을에 있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면, 마을에 서식하고 있는 많은 백수들의 가능성을 세계를 구하기 위한 마을을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다.


마을이 가지고 있는 최후의 보루는 마을에서 잠자고 있는 백수들의 조직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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