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 있는 백수생활:정보를 유통하는 정보 상인이 돼라

슬기로운 백수생활 #5

by 낭만박사 채희태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바야흐로 정보 범람의 시기다. 11세기 부르주아지가 십자군이 동양에서 약탈해 온 물자를 유통하면서 부를 축적했듯이, 범람하는 정보를 효율적으로 유통할 수 있는 역할은 오직 백수들의 몫이다. 입장이라는 일상에 갇혀있는 비백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정보를 유통하지 않고 오히려 소유한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한 번은 학교 밖 청소년들 대상으로 사업을 하고 있는 한 공공기관에 운영위원으로 위촉되어 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공공기관이 그렇듯 운영위원 앞에서 자신들의 전문성과 그 노력을 한껏 뽐내고 싶었으리라. 자신들은 작년엔 몇 명의 학교 밖 아이들을 만났고, 올해에는 더 많은 학교 밖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발표를 들으며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했다.


“이 기관이 점점 더 발전하려면...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계속 더 불행해져야 하나요?”


그 기관을 비난하고자 든 비유가 아니다. 그 기관의 대표는 매우 헌신적이며, 서울시에서 이동 쉼터를 위탁받은 그 기관 또한 누구보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인권을 위해 노력해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저 한껏 복잡해진 사회 속에서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성실하게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심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은 것이다. 기득권을 위해 정보를 소유하는 대표적인 분야는 역시 정치다.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음모 집단의 내부 고발자, 윤태호 원작의 영화 '내부자들'을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우장훈 검사(조승우)는 미래자동차 비자금 사건을 조사하던 중 이 사건에 유력한 대선주자인 장필우(이경영)와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사 주간인 이강희(백윤식)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장훈 검사는 이들에서 배신을 당한 조폭 안상구(이병헌)가 비자금 증거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고, 폴리페서로 국회의원이 된 대학 은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우장훈 검사 : 교수님은 요즘 어떠십니까?
폴리페서 : 뭐가?
우장훈 검사 : 걱정이 좀 돼서요. 교수님 같으신 분이 이런 정치판에 계신다는 게 좀…
폴리페서 : 내가 처음 여의도에 들어올 때, 누군가 나한테 그러더라구. 여당, 즉 집권당이 되는 거 외에 국회의원이 정치적으로 지향할 것은 없다. 정치란 큰 의미로 생존! 국가의 생존, 국민의 생존, 그리고 나의 생존이다. 하하….


소위 정치라는 입장이 지향하는 바가 과연 국가와 국민의 생존일까? 정치인에게 국가와 국민의 생존이 자신의 정치적 생존보다 더 중요할까? 물론 모든 정치인들이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문장 속에 포함되어 있는 ‘정치’의 개념과, 현재 전문 영역으로 분화되어 존재하고 있는 ‘정치’의 개념이 같지 않다는 것 정도는 막연하게나마 느낄 수 있다.


백수는 다양한 입장과 전문성으로 분화되어 있는 이 사회를 횡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중세시대에 농사를 짓는 농노나 농노를 지배해야 하는 영주나, 그 영주를 지켜야 하는 기사는 자신의 분명한 역할이 있었기에 물자를 유통하는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응답할 수 없었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특별한 역할이 부여되지 않은 부르주아지뿐이었다. 백수도 마찬가지다. 바야흐로 코로나로 인해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난 새로운 표준을 찾는 뉴노멀의 시대다. 부르주아지가 영지와 영지 사이를 오가며 물자를 유통해 중세의 질서를 조금씩 무너뜨려 결국 부르주아 혁명을 일으킨 것처럼, 백수도 다양한 영역 사이를 오가며 정보를 유통해야 한다. 새로운 질서, 뉴노멀 시대는 기존 질서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정보를 효율적으로 유통하는 역할은 백수에게 주어진 시대 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