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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Nov 15. 2020

아버지에 대한 기억 1

오늘(지난 11월 2일) 아버지를 고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요양병원으로 모셨습니다. 말이 요양병원이지,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요양병으로 모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실 것입니다. 경험이 지나치게 많은 요양병원 원장은 저와 누나를 앉혀놓고 이렇게 말하더군요.

쉽게 설명드릴까요, 아니면 어렵게 말씀드릴까요?


아버지의 상태를 어느 정도 아는 저는 누나한테 나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저 혼자 듣겠다고... 환갑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소녀 갬성으로 살아가고 있는 철딱서니 누나와 슬픔을 나누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장은 가혹하게도 함께 들으라고 하더군요. 그래야 한다고... 요양병원 원장은 먼저 아버지께서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물었습니다. 생각지도 않게 아버지께서 살아오신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요양병원 원장에게는 간략하게 이야기했지만, 저는 지금부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일부를 떠올리고자 합니다.


군대에서 결핵을 앓으셨던 아버지는 당신이 먹다 남기신 밥을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늘 한쪽을 깎아서 드셨습니다. 어렸을 적 저는 아버지를 따라 밥을 먹을 때 위에서부터 먹지 않고 한쪽을 비스듬하게 깎아서 먹곤 했습니다. 전 그렇게 먹어야 하는지 알았습니다. 이래서 가정교육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한참 뒤에야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왜 그렇게 밥을 드셨는지...


농부의 아들이셨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는 농사를 짓게 하고 싶지 않으셨는지, 일찍부터 미역과 내복 등을 도매로 떼다가 파는 장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접하게 된 후, 라디오를 떼다 팔면 돈을 벌 수 있겠다 싶어 무작정 방송국을 찾아가 라디오를 도매로 달라고 떼를 썼다고 하셨습니다. 방송국에서는 여기는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니 청계천 쪽으로 가 보라고 알려 주었고, 그때부터 라디오, 전축, 그리고 시계 등을 떼다 파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엔 라디오나 전축의 가격이 만만치 않았던지라 주로 할부로 파셨습니다. 카드가 있던 시대가 아니니 물건을 할부로 팔고, 매달 찾아가 수금을 하러 다니시곤 했습니다. 그런데 생필품이 아닌 라디오나 전축을 한 집에 계속 팔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아버지는 학교를 다니고 있던 누나, 큰형, 작은형을 할머니께 맡기고, 다섯 살인 저만 데리고 외지 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저는 이사를 많이 다녔습니다.  지역에 할부 라디오나 전축을 팔고, 어느 정도 수금이 되고 나면 다른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이사를 해야 했으니까요.  번은 이사  곳을 알아보기 위해 지역 답사를 다니시는데, 007 가방을 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아버지를 동네 꼬마들이 간첩이라고 신고했다고 합니다. 마침 아버지의 가방에는 라디오에 연결하는 어댑터 , 당시엔 생소한 기계 부품들이 들어 있었고, 아버지를 잡은 경찰들은 일계급 특진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그게 무엇인지 추궁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답답해서  지역에 전파사가 있으면 아무나 불러달라고 해서 겨우 풀려나셨다고...


대략 다섯 살 무렵부터 국민학교 입학 전까지 부모님을 따라 온양, 평택, 선장 등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습니다. 부모님을 따라다닌 덕분에 전 다른 형제들은 받아보지 못했던 매일 10원의 용돈을 받을 수 있었고, 주로 라면땅을 사 먹느라 10원을 썼습니다. 그리곤 저녁때가 되면 부모님께 이렇게 물었답니다.

엄마, 나 오늘 10원 먹었수?


어머니가 쓰시는 용어를 빌자면 저는 이사를 다니며 사글세에 살았고, 가끔 주인집 아이가 저한테 자기네 마당에서 놀지 말라며 갑질을 하면 어머니는 땅에 금을 긋고는 여기까지는 우리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빌린 거니 뭐라고 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런 저의 유년시절이 저를 소심하고 다른 사람의 인정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람으로 만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모태 관종이자, 늘 주변 사람들의 인정에 굶주려 있습니다. 지금은 극복이 지나쳐 오히려 문제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 회의 중에 제가 말을 할 때 누군가 인상을 쓰고 있으면, 내가 말을 잘못했나? 하고 걱정을 했었습니다.  


앞으로 몇 차례 나누어 어버지에 대한 기억을 꺼내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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