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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Apr 21. 2021

나의 교육 생애...

교육학에 문외한인 나는 평생교육 전공 박사과정을 하기 위해 교육학과 선수과목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자녀 또래의 교육학과 학부 선배님(교육학에선 선배님이시므로...)들과 "평생교육 방법론" 수업을 듣고 있다. 나는 푸릇파릇한 학부 선생님들의 기를 받아선지 그 수업을 듣고 나면 일주일의 피로가 싸악 풀린다. 반대로 학부 선생님들은 왠지 모를 피곤함을 느낄지도... ㅎㅎ


두 번째 수업의 과제는 나의 교육 생애를 이그나이트 방식으로 발표하는 것이었다. 이그나이트란 PT 한 쪽당 15초씩 자동으로 돌아가게 만든 후 PT의 속도에 맞게 발표를 하는 것이다. 총 20장, 그러니까 5분 안에 자신의 교육 생애를 이야기해야 하는데, 학부 선생님들보다 약 두 배 반 넘게 살아온 나라고 예외는 없었다.


아무튼 덕분에 나의 교육 생애를 쭈욱 돌아보게 되었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나레이션을 입히겠지만 지금은 텍스트로 대신한다.


영상에 들어간 BGM은 내가 직접 작곡한 음악들이다.

1P : 살아왔던 모든 날이 배움이었다. 아는 것이 없어서,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알아가는 것이 재미있어서... 왼쪽에 그림은 어느 날 박재동 화백님이 그려 주셨다.

2P : 초등학교 때 나를 키운 것은 학교가 아니라 만화였다. 특히 태권V에 푸욱 빠져 살았다. 어른이 되어서도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로... 눈이 있으면 태권V를 만들고, 그릴 것이 있으면 태권V를 그렸다. 만약 어디선가 태권V가 그려져 있는 걸 본다면 그것은 아마 내가 머무른 흔적일지도 모른다.

3P : 중학교 땐 친구만 있으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불렀던 시절이었다. 한 친구는 세상을 떠났고, 다른 한 친구는 요양 병원에 있고, 또 다른 한 친구는 독일에 있다. 그리고 서울에 살고 있는 친구는 가까이 있어 더 만날 수가 없다.

4P : 고등학교 땐 3년 내내 농구만 했다. 지금의 나를 지탱해 주는 근육은 아마 그때 모두 만들어졌을 것이다. 고3 땐 체력장을 준비한다는 미명으로 농구장에서 살았고, 학력고사 보기 전날까지 농구를 해서 결국 재수를 했다. 내가 재수를 해서 대학을 갈 수 있었던 유일한 비결은 재수를 하는 1년 365일 동안 농구를 단 10번밖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5P~6P : 대학에 들어가선 공부 빼고는 다 해봤던 것 같다. 죽도록 놀고, 살도록 싸웠다.

7P : 그래서 부모님으로부터 강제 입대를 당했다. 입대 전날 난 부모님께, "다른 부모들은 빽을 써서 자식들 군대를 빼는데, 어떻게 우리 부모님은 빽을 써서 자식 군대를 보내느냐"며 따졌다. 어쩌다 군악대에 들어가 심지어 군대에 가서도 재밌게 놀았다.

8P :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했지만, 곧 IMF가 터졌다. 난 프리랜서를 가장한 백수 작곡자로 3년을 버텼다. 내가 참여한 프로젝트가 운 좋게 LG 하이미디어 대상을 수상해 경향신문 매거진X에도 실리게 되었다.

9P : 결혼을 하고 나서 음악으로는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 없을 것 같은 책임감에 회사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토끼 같은 마누라와 여우 같은 두 딸을 낳았다.

10P : 2001년 결혼하고 들어간 회사에서 나는 "열무"라는 캐릭터를 기획했고, 그래서 지금도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사용하고 있는 내 닉네임은 "열무아찌"이다.

11P : 2001년에 들어갔던 회사가 문을 닫아 2006년에 출판사에 들어갔다. 친구들은 너처럼 책 안 읽는 친구가 어떻게 출판사를 들어가냐고 비웃었다. "난 나처럼 책 읽기 싫어하는 사람도 읽고 싶은 책을 만들겠다"고 답했다.

12P : 2010년 친구가 구청장에 출마한다고 해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나왔다.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어쩌다 공무원이 되었고, 주민이 축제의 주인으로 등장하는 주민참여형 축제를 제안했다.

13P : 2012년 교육경비보조금으로 마을과 학교가 협력하는 "지역사회 교육콘텐츠 연계 사업"을 제안하고 추진하였다. 이 사업으로 인해 난 처음으로 교육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14P : 2013년 8채의 집을 허물고 들어설 도서관 부지에 기존의 집을 리모델링해 주제별 도서관으로 엮어 도서관마을로 조성하자고 제안했다. "구산동도서관마을"은 2016년 대한민국 건축상 대상을 수상하였다.

15P : 2015년 5월부터 2년 2개월 14일 동안 서울시교육청에서 혁신교육지구 담당 주무관으로 일했다. 교육청에서 일하면서 "교육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질문을 허용하는 것이다!"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16P : 행정에서 일을 해 보니 그토록 지긋지긋했던 공부가 하고 싶어 졌다. 그래서 대학원에 들어갔다. "교육 거버넌스를 둘러싼 갈등 사례"를 연구하여 우수운 성적으로 석사가 되었다.

17P : 아이가 아팠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이의 곁을 지키면서 나를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고, 그 고통의 과정이 나를 성장시켰다.

18P : 그러면서 느꼈다. 동화는 동심을 살고 있는 아이들이 읽는 것이 아니라 동심에서 멀어져 버린 어른들이 읽어야 하는 것이라고...

19P : 오랜 고통의 시간을 딛고 책을 출판했다. 사회 구조의 잘못으로 인해 양산되고 있는 백수들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 "만국의 백수들이여, 당당하라!"

20P : 부상을 당한 강백호는 경기 출전을 막는 감독에게 영광의 시절이 언제였는지 물었다. 자신은 바로 지금이라고... 나이 50이 넘었지만, 아직 나의 리즈 시절은 오지 않았다. 아니, 나의 몸과 나의 생각이 멈추는 그날까지 나의 리즈 시절은 오지 않을 것이다. 모름지기 평생교육이란 그런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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