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박사과정 #2
# 박사과정 첫 발표를 마치고 인천으로 돌아와 3월 9일에 쓰기 시작한 글입니다.
두 번째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첫 수업인 오리엔테이션에서 호기롭게 첫 발표를 맡았던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 첫 발표를 누가 해 보겠냐는 교수님의 질문으로 인해 발생한 정적을 깨기 위해서였다. 난 침묵을 잘 못 견딘다. 심지어 모든 침묵은 나의 탓이라는 자격지심마저 있을 정도다. 그래서 박사과정이라는 음식의 간도 보지 않고 덥석 맛을 봐 버렸다. 내가 미쳤지... ㅠㅠ
두 번째, 약간의 오만이 있었던 것 같다. 난 석사과정을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논문도 나름 성공적이었다 자평한다. 그래서 박사과정 발표를 다소 우습게 생각했었던 것 같다.
내가 호기를 부린 결과는 무참했다. 수업이 끝난 후 같이 수업을 들었던 분들로부터 위로를 받을 정도로...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부정성 이면에 긍정성이, 긍정성 이면에 부정성이 존재하고 있고, 그 양가성을 보자는 것이 내가 주장하고 있는 양시론이다. 하룻강아지 석사가 박사과정이라는 범에게 맞선 결과 제법 상처는 입었지만, 상처의 대가로 나름의 교훈도 얻을 수 있었다.
1. 요약이 아니라 주장
내가 맡은 발표는 논문을 발제하는 것이었다. 나름 석사 때보다 더 심혈을 기울여 논문을 읽고 요약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나의 생각도 곁들여 발표했다. 발제 시간을 20분이었는데, 발표를 마치고 나니 30분이 지났다고 했다. 나의 발제는 한 마디로 내용 없이 장황했다. 발표 전에 나보다 먼저 박사과정에 입문한 다른 선배들의 발제문을 슬쩍 들여다 보기는 했는데, 선배들의 발제문 마지막에는 참고문헌이 적혀 있었다.
2. 말이 아니라 글
발표가 끝나고 "박사는 말이 아니라 글, 화려한 수사가 아닌 근거가 확실한 주장을 해야 한다."는 교수님의 조언을 들었다. 나는 어공으로 있으면서 갈고닦은 능력으로 논문을 개조식으로 발췌했고, 그 사이사이를 장황한 말로 메웠다. 말은 글보다 간편하다. 하지만 그 간편함은 주장의 논리적 전개에 독이 된다. 한 번은 내가 했던 말(강의?)의 녹화본을 다시 본 적이 있다. 말하는 내내 논리의 비약은 말할 것도 없고, 주어와 술어가 따로 노는 경우가 허다했다.
3. 주제에 천착하라!
학부 때는 국문학을, 그리고 사회학으로 석사를 마친 나는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하기보단 메뚜기처럼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던 이유 중 하나는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때 꿈은 로봇을 만드는 과학자가 되어 형들과 함께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지금 삼형제의 그 결의에 가장 다가가 있는 사람은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는 작은형이다. 중학교 때는 미대에 가고 싶었다. 학원에 보내 줄 돈이 없다는 부모님의 말에 나는 쉽게 순응했다. 고등학교 때는 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대중음악을 가르치는 대학이 없었다. 난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막혀 있으면 용기를 내어 길을 내기보단 샛길로 돌아 다른 길을 찾아왔던 것 같다. 그러나 박사 과정은 그렇게 해서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아닌 것 같았다.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겠지만, 더 이상 피하지 않고 돌파를 해야 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