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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Oct 24. 2021

꼰대에게 희망을 2

  글은 민들레출판사의 『격월간 민들레』 137(2021 9 25 발행) 기고한 글이며 글에 등장하는 딸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알아서’하겠다는 말


그렇지만 딸과의 갈등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이 되자 딸은 자해를 하기 시작했다. 담임선생님도 알고, 동생도 알고, 그리고 옆지기와 나도 알게 되었다. 중3으로 올라가는 겨울방학 땐 가출을 하기도 했다. 집에 돌아온 딸의 핸드폰을 압수하려 하자, 딸은 그 유명한 패드립 3종 세트를 쏟아냈다.


내가 언제 낳아달라고 했어?
지금까지 엄마, 아빠가 나한테 해 준 게 뭐야!
나 올해 안에 자살할 거니까, 그때까지 나 좀 내버려 둬!


집 안은 하루하루 지옥이 되어 갔다. 아침마다 자고 있는 딸을 깨우느라 씨름하는 옆지기를 보며 출근을 했고,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기 전엔 현관 앞에 서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매일같이 딸을 지켜봐야 하는 옆지기는 나보다 더 지쳐가고 있었다. 세 살 어린 동생도 걱정이었다. 딸은 전학을 가고 싶다고 했다. 난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가족을 깰 수밖에 없었다. 인천 집에서 부모님이 계시는 서울로 딸을 데리고 나왔다. 전학을 하면 열심히 학교에 다니겠다던 딸의 다짐은 딱 일주일짜리였다. 한 주가 지나자 딸은 또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난 출근을 하기 전 매일 아침 한 시간씩 딸을 깨웠다. 아무리 깨워도 꿈쩍하지 않는 딸을 보며 온갖 잡생각이 들락거렸다. “일어나라고 소리를 질러 볼까?”, “차라기 같이 죽어 버리면 이 고통이 끝나지 않을까?”, “내가 옳은 것일까, 딸이 옳은 것일까?” 그러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절대 후회할 짓은 하지 말자고…. 중1 때 아이에게 손찌검을 했던 반성과 후회가 돌고 돌아 그렇게 약이 되었다. 딸은 자기가 ‘알아서’ 갈 테니 나에게 그냥 출근하라고 했다. 그 당시 난 딸의 입에서 나오는 ‘알아서’라는 말이 가장 무서웠다.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엄마의 압박에서 벗어나자 자해도 ‘알아서’ 더 심해졌다. 


하루는 점심을 먹고 있는데 학교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상담 선생님의 전화였다. 아이가 점심시간 다 되어 학교에 왔는데,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난다고 했다. 난 밥을 먹다 말고 학교로 달려갔다. 선생님 말대로 딸은 쓰러져 있었고, 아무리 흔들어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눈을 벌려 보니 동공이 반쯤 풀려 있었다. 아이를 업고 차에 태웠다. 병원에 가려고 했더니 조금 정신을 차렸는지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방에 눕힌 후 한 시간 간격으로 방문을 열어 보았다. 다행히 볼 때마다 누워있는 자세가 달랐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딸은 정신을 차렸다. 

주말이라 인천 집에 가는 날이었다. 서울에서 인천으로 가는 차 안에서 딸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기억이 안 난다고….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딸은 일주일치 우울증 약을 한꺼번에 먹어서 그런 것 같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언젠가 딸에게 왜 자해를 하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딸은 살고 싶어서 자해를 한다고 했다. 그런 딸에게 왜 그랬느냐고  다그칠 수도 없었고, 물어보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대부분의 부모가 꼰대가 되는 이유


중학교 졸업장 받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 예전엔 미처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가지 않겠다던 딸은 서울 은평구에 있는 오디세이학교에 입학했다. 마침 직장이 은평구라 일 년 동안 함께 등하교를 했다. 자해는 조금씩 잦아들었고, 아침에 일어나 함께 등교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시간을 보냈다. 고등학교 2학년, 일반고 복귀를 앞두고 딸은 또다시 흔들렸다. 마침(?) 코로나가 터졌다. 자퇴를 하고 싶다는 딸에게 옆지기는 코로나 때문에 학교도 자주 안 가는데 그냥 다니면 안 되겠냐고 했지만 딸은 기어이 자퇴를 감행했다. 난 자퇴를 결심한 딸에게 응원의 편지를 써서 주었다. 

            

그것이 도피든 도전이든 딸은 이제 사회와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나 오롯이 딸이 판단하고 책임져야 하는 길에 들어선 것 같구나.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서로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남겼던 감정의 줄다리기도 했지만, 아빠는 아빠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그저 부모로서 자식이 더 쉽고 편한 길을 선택해 주었으면 하는 구질구질한 사랑의 표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아빠의 마지막 잔소리라고 생각하고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옛날 언젠가처럼 읽지 않고 찢어버려도 뭐 할 수 없고….
…<중략>…
기성세대로서 아빠는 딸보다 더 많은 시간을 살아왔지만, 단지 더 많이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아빠의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경험이 아닌 가능성의 기준으로 본다면, 아빠의 죽은 경험은 딸이 가진 살아 있는 가능성에 비해 오히려 하찮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다만, 아빠가 딸의 가능성을 존중하는 것처럼, 딸도 세상의 모든 경험을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이 가진 짧은 경험이나 불확실한 가능성만 옳다고 확신하는 ‘어린 꼰대’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빠가 딸에게 하고 싶은 마지막 잔소리는... 여기까지!!! 
2020년, 세월호 6주기 4월 16일 아빠가…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한다는 기대를 내려놓자, 딸은 아침에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자신이 누리는 자유에 대해 조금씩 책임을 지기 시작했다. 열아홉이 된 딸은 얼마 전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취득했다. 그리고 지금은 틈틈이 알바를 하며 문예창작과에 들어가기 위해 입시 준비를 하고 있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라켓소년단’에서 라영자 코치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꼰대들이 자주 하는 실수가 뭔지 알아? 뭐든 다 안다고 생각하는 거. 시합 뭐, 우리가 뛰나? 우린 방법만 제시하고 애들 믿고 맡기는 거지. 자기들 인생인데…”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부모가 꼰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처음 부모가 되었을 때 가졌던 단단한 책임감이 책임의 대상과 상호작용을 통해 진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에 주인이 되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는다. 부모에게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할 대상으로 자식만 한 것이 또 있을까? 나는 독립적 인격체로 성장하고 있는 딸을 사랑으로 간섭하고, 책임으로 가두면서 부모로서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찾고 있었는지 모른다. 


누구나 새로운 길에 들어서면 애벌레가 된다. 결혼을 하면 부부 애벌레가, 아이를 낳으면 부모 애벌레가, 그리고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나면 학부모 애벌레가 된다. 문제는 언제나 자신이 애벌레가 아닌 나비라고 착각하면서 시작되거나 증폭된다. 사실 정보 빅뱅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애,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애벌레라고 할 수 있다. 일신우일신, 하루하루 새로 생산되는 정보는 과거의 정보를 압도하고 있고, 그런 관점에서 나비에 더 근접한 애벌레는 부모가 아니라 아이들이다. 만약 우리가 나비가 아닌 애벌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고목나무에 꽃이 피듯, 꼰대에게도 희망이 찾아오지 않을까?


“우리가 곤경에 빠지는 이유는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 마크 트웨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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