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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May 07. 2022

지금 뭐 하자는 거요?

핸드폰을 둘러싼 딸과의 줄다리기를 끝내며...

<미스터 션샤인> 4화... 유진초이는 열차에서 사라진 미군의 총을 찾기 위해 고애신을 영사관으로 불러 심문(?)한다. 몇 차례 심문을 가장한 선문답이 오가고, 윗선을 묻는 유진초이의 질문에 발끈한 고애신은 지금 뭐 하자는 거냐며 따진다. 그러자 유진초이는 담담하게 말한다.  

보호요!


김태리를 대한민국 최고 배우 반열에 올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우리 부부가 큰딸에게 핸드폰을 사 준 이유도 처음엔 그저 보호를 위해서였다. 한 번은 큰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후, 비가 오는 날 엄마와 연락이 되지 않아 학교 앞에서 비를 쫄딱 맞고 기다린 적이 있었다. 옆지기와 난 고심 끝에 큰딸에게 핸드폰을 사 주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 부부는 딸의 위치를 핸드폰으로 확인하며 비로소 안심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좋았는지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을 만지고 있는 큰딸...

큰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게 2010년이니 그 당시 난 아이폰3Gs를 사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폰이 나오기 전까지 난 주로 꽁짜폰을 사용하며 휴대폰에 큰돈을 투자하지 않았다. 아이폰이 세상에 나온 시기는 2007년, 하지만 우리나라엔 2년이나 늦은 2009년 가을에 출시되기 시작했다.

 

IT 강국 대한민국을 스마트폰 후진국으로 만든 건 다름 아닌 대기업들이었다.


아이폰은 나를 신세계로 인도했다. 그전까지 난 아이들의 모습을 넘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늘 작은 사진첩을 들고 다녔는데,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지금은 별로 사용하지 않지만, 그 당시 난 아이폰으로 기타를 연주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었다. 거슬러 올라가 보니 내가 "모태관종"이 된 이유도 아마 아이폰 때문인 것 같다. 아이폰은 나에게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제공해 주었다.


iPhone으로 연주한 "Hotel California"와 "Stairway to Heaven"


물리학에 "열역학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열역학 제1법칙은 우주에 존재하는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며 어떠한 에너지를 얻으면 같은 양의 에너지를 잃는다는 "등가교환"이고, 열역학 제2법칙은 우주의 모든 에너지는 유용한 에너지에서 무용한 에너지도 비가역적으로 변해간다는 이른바 "엔트로피"다. 놀랍게도 물리학의 열역학 법칙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아이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딱 그만큼 많은 것을 앗아갔다.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고, 흘러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것처럼 우리 가족의 유용한 에너지는 손바닥만 한 핸드폰으로 인해 질서에서 무질서로 빠르게 이동해 갔다.


휴대폰이 생긴 것만으로도 뛸 듯이 기뻐했던 큰딸은 언젠가부터 스마트폰을 사 달라고 졸랐다. 친구들끼리 카톡으로 소통하기 위해선 스마트폰이 필요하다고 했다. 요즘 아이들에겐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것이 소위 "왕따"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왕따가 된다는데 자식을 왕따로 내몰 만큼 내 심지는 굳지 못했다. 난 이왕 스마트폰을 쓸 거라면 안드로이드보다 아이폰을 쓰길 바랐다. 그때부터 우리 가족은 내가 새 아이폰 사면 내가 쓰던 아이폰은 옆지기가, 옆지기가 쓰던 아이폰은 큰딸이, 큰딸이 쓰던 아이폰은 둘째 딸이 쓰는 아이폰 대물림이 시작되었다.


왼쪽부터 아이폰3Gs, 4, 4s, 5, 6... 이때가 2014년이다


이 얘길 하려던 게 아닌데...

어쨌든, 가족 모두가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하면서 선조들의 육아 경험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새로운 유형의 갈등을 겪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보며 잠을 자지 않자, 자러 들어갈 때 스마트폰을 거실에 두도록 했고,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엄마와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늘 늦게 퇴근했던 나는 비겁하게도 그 갈등에서 늘 벗어나 있었다.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시작했던 통신사의 "아이서치 서비스"는 아이들의 보호가 아닌 감시로 옮겨갔다. 어느덧 사춘기에 접어든 큰딸이 수시로 보호의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큰딸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 나는 어쩔 수 없이 가족의 휴대폰 갈등에 참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수학여행 준비를 해야 하는 큰딸이 휴대폰만 보고 있자 엄마와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고, 내가 큰딸의 핸드폰을 빼앗자 큰딸은 마치 세상을 잃은 것처럼 통곡했다. 난 딸에게 짐승처럼 소리를 질렀고, 큰딸은 스스로 핸드폰을 던져 뽀갰다.


체념인지, 반성인지, 아니면 객기인지... 핸드폰을 뽀갠 후 나에게 보낸 큰딸의 편지
중2가 된 큰딸은 핸드폰을 바꿔달라며 만만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난 딸에게 엄마가 휴대폰을 바꿔주지 않는 이유가 있지 않겠냐고... 당분간 만이라도 스스로 휴대폰 사용을 통제하는 모습을 엄마한테 보여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딸은 휴대폰이 너무 구형이라 자꾸 튕겨서 그렇다며 휴대폰을 바꿔주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난 딸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엄마와 딸 사이에 중재안을 마련해 주었다.


큰딸과 견해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내 기억에 저 중재안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이후로도 휴대폰을 둘러싼 갈등은 계속 이어졌고, 갈등의 질과 양은 오히려  증폭되어 갔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휴대폰으로 인해 불거지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딸과의 갈등은 세계관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드라마 <미스터션샤인> 2화에서 고애신은 할아버지가 기별지(신문?) 읽지 못하게 하자, 그러면 차라리 죽겠다고 항변했고, 할아버지 고사홍은 그런 손녀에게 그러면 차라리 죽으라고 답했다. 농경시대를 살아온 고사홍에게 개화기의 기별지는 이 시대 부모들이 생각하는 휴대폰처럼 통제가 불가능한 발칙한 물건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자신은 그 이기를 맘껏 누리면서도 자식세대에게는 통제가 필요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엇이든  가진 자가 자신이 가진 것을 기준으로  가지지 못한 자를 통제하려고 하는 욕망은 인간이 지닌 본성인 것 같다.


할아버지 고사홍도 손녀 고애신을 그저 "보호"하고 싶었을 것이다.


큰딸은 드디어 2022년 1월 1일 자로 법이 인정한 성인이 되었다. 제도가 정한 미성년과 성년의 기준이 무에 그리 중요할까 싶기도 하지만, 그게 또 무시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큰딸은 2021년 12월 31일 자정,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무섭게 편의점으로 달려가 소주를 사 왔다. 이때 편의점 알바가 민증 검사를 안 하면 또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다고 한다.  


난 2021년 마지막과 2022년 시작을 공주에서 보냈다.


그리고 얼마 전 큰딸의 생일날 통신사로부터 시원섭섭한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당신의 딸이 이제 생일까지 지나 완벽한 법적 성인이 되었으니 더 이상 딸이 어디서 무슨 짓을 하든지 상관하지 말라는 통보였다.

KT가 보내온 시원섭섭한 문자 한 통...


내가 이 장황하고도 허무한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오로지 저 한 통의 문자 때문이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 당시엔 왜 그렇게 집착을 했을까? 지금 내가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덤덤해지거나 하찮아질까? 아무튼 이제 진짜, 잘 먹고 잘 살아라~ 큰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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