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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Aug 21. 2023

<교육언론 窓> 창간에 대한 기대와 우려

 <교육언론 窓> 창간에 부쳐...

제78주년 광복절이었던 지난 8월 15일, "언론다운 언론, 교육다운 교육"이라는 기치를 내 걸고 <교육언론 창>이 창간되었다. <교육언론 창>은 이름 그대로 교육을 주제로 한 언론이다. 창간호에는 교육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많은 인사들의 축하 인사를 남겼고, 교육 현안과 관련한 풍부한 기사, 그리고 교육을 주제로 하는 다양한 글들로 채워졌다. 그 안에는 필자의 칼럼 한 편도 포함되어 있다.



보다 나은 교육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교육언론 창>의 창간에 찬물을 끼얹을 의도는 전혀 없다. 하지만, 의도를 가진 모든 행위에는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앞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뒤와 멀어지는 것이며, 열역학 제1 법칙을 무리하게 적용하면 그 기대와 우려는 서로 등가의 관계에 있는지도 모른다. 2015년 김영란법이 만들어질 때에도 난 비슷한 기대와 우려를 했었다. 김영란법으로 인해 공직 사회가 조금은 청렴해질 거라는 기대와 이제 대한민국은 법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는 우려… 혹시 법에 대한 일방적인 기대와 지나친 믿음이 대한민국 초유의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 선출로 이어진 것은 아닌지 의심해 봄 직도 하다.


기대와 우려가 만들어 내는 에너지는 시간이나 공간, 또는 신념이 만들어 낸 사회체계의 영역과 영역 사이를 넘나든다. 시간과 공간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지만, 사회를 쪼개며 존재하는 신념의 영역은 마음만 먹을 수 있다면 - 사실 그게 가장 힘들지만 - 어느 정도는 통제가 가능하다. 만약 <교육언론 창>에 어느 한쪽의 기대가 일방적으로 집중된다면, 다른 한쪽의 우려는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나치게 큰 기대는 같은 크기의 우려로 이어질 수 있으며, 한껏 부풀어 오른 기대와 우려의 충돌은 그 사회에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긴다. 경제 성장과 한류가 일시적으로 가리고 있지만,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는 기대와 우려가 서로를 할퀸 상처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 상처를 제대로 치유한 경험을 가지지 못했으며, 적지 않은 시간을 거치며 축적된 수없이 많은 기대와 우려는 현재 태극기와 촛불이라는 상징으로 수렴되고 있는 듯하다.


혹시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정리를 해 볼 생각이지만, 역설적으로 중세가 "종말"을 "기대"하며 유지되었다면, 현재 자본주의는 “기대"라는 거품을 쫓아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는지도 모른다. 종말은 종교가 지배했던 중세의 착취 논리인 동시에 그 착취를 견딜 수 있는 유일무이한 희망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우려"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기대"가 중세의 종말과 유사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기대의 크기와 속도를 적절하게 조정하면서 우려와 상호 작용을 꾀한다면 서로 다른 기대와 우려가 충돌해 생기는 상처를 줄일 수 있으며, 나아가 이미 곪아버린 오래된 상처들을 치유할 작은 가능성이 열릴지도 모른다. 혹자에게는 <교육언론 창>의 창간에 즈음해 하는 나의 조언이 잔칫상에 끼얹는 찬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진심은 서로 다른 기대와 우려가 만들어 낼 충격을 줄이고자 함임을 부디 믿어 주기 바란다.


첫째, <교육언론 창>은 누구의 언론인가?


작년이었나? 대학원 토론 수업 중에 한 교감 선생님이 교사의 업무 강도가 지나치게 쎄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한때 2년 2개월 14일 동안 교육행정의 어공으로 근무를 했던 적이 있었던 터라 학교 현장의 어려움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 난 우리나라 모든 노동자의 노동강도를 지표화해 객관적으로 비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권력이 복잡하게 구조화된 사회에서는 모두가 스스로를 약자로 인식하는 소위 "약자 코스프레"에 몰입한다. 대한민국의 행정 수반인 대통령도, 지엄한 입법 권력을 가진 국회의원도, 그리고 교육의 모든 권한과 책임을 떠안고 있는 교사도 그 행위의 대상이자 최종 소비자인 민원인 앞에서는 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민원이라는 행위 자체를 악한 행동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어쩌면 "민원"이야말로 진정한 약자들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특히 교육 민원은 교육에 대한 지나친 기대로 인해 늘 이면에 가려져 있었던 우려가 - 그 기대가 힘을 잃게 되자 -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것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열역학 제1 법칙을 교육에 적용하면 동시대적이지 않을 뿐 기대와 우려의 에너지는 같을 수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접적인 명분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이지만, 심리적인 이유는 한때 동서 냉전을 주도하며 미국과 맞짱을 뜨던 소련의 기대 유전자가 고스란히 러시아에 남겨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임금, 부모와 동급이었던 교사의 지위에 대한 특별한 기대는 임금도, 부모도 할 수 없었던 계층 상승을 가능하게 했던 존재가 바로 사부였기 때문이다. 이는 이전과는 다른 근대교육의 독특한 쓸모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딸이 자신이 대학에 합격하면 학원 선생님께 무슨 보답을 할 것인지 물은 적이 있다.


나 : 학교 선생님은? 학교 선생님한텐 선물 안 해?
딸 : 학교 선생님은 나 대학 가는 데 보태준 것이 없는데 무슨 선물을 해?


현실에 존재하는 교육에 대한 모든 생각과 관점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마뜩잖더라도 <교육언론 창>이 교사의 기대뿐만 아니라, 교육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이 시대 모든 구성원의 교육에 관한 다양한 생각과 관점을 담을 필요가 있다. 학생과 학부모뿐만 아니라, 마을교육공동체를 통해 새로운 교육의 주체로 부상하고 있는 지역사회까지도... 그래야 범람하고 있는 정보가 권력에서 벗어나 수평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의도치 않은 기대와 우려의 충돌을 막을 수 있다.


둘째, 교육은 시혜가 아니라 권리다!


먼저 얼마 전 극단적 선택으로 사랑하는 제자들 곁을 떠난 서이초 선생님께 깊은 애도를 표한다. 한편으로 서이초 교사의 자살이 학생인권조례로 인해 교권을 보호할 마땅한 법적 장치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논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 학생인권조례가 학생들이 주장한 권리였는지, 아니면 학생들은 알지도, 원하지도 않는 권리를 챙겨주기 위한 소위 시혜는 아니었는지 곱씹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서이초 교사의 자살로 인해 촉발된 제5차 국회 앞 교사집회에서 "국회는 행동하라, 언제까지? 9월 4일!"이라는 요구와 "이제 국회의 시간"이라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언제 국회의 시간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던가? 대한민국은 늘, 언제나, 항상 국회의 시간이었다. 법은 모든 국민에게 적용되는 가장 강력한 법적 장치이다. 마을교육공동체 활성화 지원 법안을 토론하는 자리에 발제자로 참여했던 필자는 제도 이전에 마을교육공동체에 대한 범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먼저라고 주장했던 적이 있다. 답이 없을 것 같은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법이라는 깃발이라도 꽂고 싶은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나, 그러한 조급함이 오히려 우리 사회를 더 갈등으로 내몰아 왔던 것은 아닌지 잠시 멈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법의 제정은 이성적이어야 하다. 그리고, 사회 구성원의 충분한 합의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서이초 교사의 자살로 인해 뜨겁게 달궈진 학교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 법을 만드는 행위에서 이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제발 국회는 빠져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면, 강백호의 왼손처럼 시민들이 이 사태에 대한 근본적인 진단과 합의를 할 수 있도록 뒤에서 거들던가...


만화, <슬램덩크> 마지막 권 중에서...


셋째, 교육과 관련한 다양한 정보가 수평적으로 흐르길…


교육이라는 단어는 매우 전근대적인 용어이다. 교육은 그 속성상 어쩔 수 없이 교수자와 학습자라는 ‘경계’를 만든다. 교수자와 학습자 사이의 경계는 교육 에너지를 한 방향으로만 흐르게 만드는 위계를 가진 경계다. 프레이리는 이러한 교육의 속성을 “은행 저금식”이라고 꼬집었다. 조한혜정 교수는 "후기 근대 세대 간 갈등과 공생의 전망(2010)"이라는 논문에서 농경사회처럼 변화가 크지 않은 곳에서는 어른 세대가 부당하고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청년들이 있더라도 그것은 개별적 불만에 그치며 장년 중심의 사회적 질서가 오래 지속되지만, 급변하는 전환기일수록 젊은 세대가 기존 사회의 문제를 인지하고 풀어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들의 경험과 인식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비슷한 예는 대한민국만 비껴간 68혁명의 예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68혁명은 2차 세계대전의 폐허가 채 복구되기도 전에 다시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전쟁 세대에 대한 젊은이들의 분노로 촉발되었으며, 우리가 현재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대부분의 인권 의식은 그 당시 젊은이들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그 뿐만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독일에서 나치가 청산된 것도 68혁명을 통해서였다. 우리도 청년 세대의 목소리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이고 힘을 실어 주었더라면 친일 논란과 갈등이 현재까지 이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교육언론 창>이 똑똑한 꼰대들의 언론이 아니라 꼰대와 싸우다 꼰대가 되어 가고 있는 미숙한 아이들의 교육 이야기로 채워질 때, 창간 슬로건으로 내건 언론다운 언론, 교육다운 교육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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