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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백수 채희태 Sep 21. 2023

한국판 어벤져스? <무빙> 후기

강풀만의 독특한 이야기 전개와 감성이 엿보이는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무방> 최종화가 공개됐다. 웹툰을 보지 않아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마지막, 20화 "졸업식"을 보기 전까지 난 '의미'는 포기한 채 오로지 '흥미'로만 <무빙>을 보았다. 이는 지금까지 강풀 원작을 볼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판타지와 현실적 개연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더라도 픽션에 민감한 역사적 사건을 무리하게 끼워 넣은 것이 심히 불편했기 때문이다. 1987년 KAL기 폭파 사건은 그렇다 쳐도, 1994년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갑자기 사망한 김일성 주석 관련 사건을 국정원의 개입이라는 지극히 냉전적 사고로 접근한 것은 나가도 너무 나간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강풀의 근황을 잘 몰랐던 터라 난 설마 강풀이?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판 어벤져스, <무빙>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빙>은 강풀만의 독특한 감성이 물씬 묻어나는 한국판 어벤져스라는 생각이 들어 시청을 멈출 수는 없었다. 심지어 마지막 화가 공개된다는 수요일 새벽부터 난 하루 종일 디즈니플러스를 들락거렸다. 만약 마블이었다면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초능력자들을 다만 전지전능한 영웅이나, 천하의 소시오패스 빌런으로 그려냈을 것이다.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고, 또 익숙한 <어벤져스>식 영웅 문법이다. 하지만 강풀은 판타지에나 등장하는 초능력자들을 현실로 끌어내렸다. <무빙>에 등장하는 초능력자들은 <어벤져스>에 등장하는 영웅들처럼 자신의 능력을 한껏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잘난 능력을 감추기 위해 존재하는 듯 보였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대한민국은 자신과 다른 것을 허용하는 똘레랑스가 다소(?) 부족하다. 나와 같지 않은 것은 옳지 않은 것이고, 나 또한 남들과 같아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지 않으면 소위 왕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를 앞둔 고3 장희수(고윤정)는 괴롭힘 당하는 친구를 돕다가 괴물로 낙인찍혀 강제 전학을 당한다. 그리고 하늘을 펄펄 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주인공 봉석(이정하)은 - 엄마 미현(한효주) 때문이기는 하지만 - 자신의 능력을 감추기 위해 자발적 뚱땡이로 살아간다. 한발 더 나아가 <무빙>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고뇌는 네 편 내 편을 따지지 않는다. 여기서 네 편 내 편은 바로 북한과 남한을 지칭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야기에 캐릭터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강풀만의 매력이 발산된다. 한국의 초능력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등장하는 프랭크(류승범)도 어렸을 적 엄마가 보는 앞에서 강제로 끌려가 CIA로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았던 트라우마가 있다. 그래서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어떻게든 "자식"만은 숨기려고 하는 부모들의 낯선 감정에 반응한다. 마치 <시크릿 가든>에서 재벌 김주원이 익숙하지 않은 길라임에게 반응했던 것처럼...


강풀이 말하고 싶었던 "졸업식"의 중의적 의미

시즌 1의 마지막 화 제목은 "졸업식"이다. 제목에서 사건은 잘 마무리되고, 아이들은 무사히 졸업한다는 스뽀가 그대로 읽힌다. 하지만 마지막 화를 보며 강풀이 <무빙>을 통해 그려내고 싶었던 졸업식이 단지 고등학교 졸업식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냉전의 추억을 무리하게 <무빙>으로 끌고 왔다는 내 오해와는 달리 강풀은 <무빙>을 통해 이제 케케묵은 냉전으로부터 제발 졸업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남한 기력자 제거 명령을 내리는 북한 보위부장 김현성(손병호)과 그 명령을 받는 북한 요원 김덕윤(박희순)과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 보자.


덕윤 : 흉수를 척살하면 되지 않습니까
현성 : 흉수?
덕윤 : 계획을 세우고 명령을 내린 자 말입니다.
현성 : 철저한 놈이야. 두더지 새끼처럼 어디에 파묻혀 있는지 파악이 안 돼.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우리도 준비해야디.
덕윤 : 또 반복되는 거 아닙니까?
현성 : 뭐이가?
덕윤 : 50년이나 반복된 일입니다.
현성 : 너 지금 무슨 소릴 지껄이네?
덕윤 : 공화국은 김신조를 보냈고, 남조선이 김두식을 보냈습니다. 공화국이...
현성 : 너 나 가르치네?
덕윤 : 그 과정에서 애꿎은 인민들만 수없이 죽어 나갔단 말입니다.
현성 : 그 언사 책임질 수 있어? 한 치 혀가 널 반동으로 만드는 거 알디? 잊지 말라, 희생은 불가피하다.


바로 이 장면에서 마침내 강풀은 <무빙>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묵직한 주제를 던진다.


바로 이 대사가 강풀이 말하고 싶었던 <무빙>의 주제 아닐까?
인민은 죄가 없다.
죄는 희생을 강요하는 자에게 있다.


강풀은 <무빙>을 통해 남과 북 사이에 놓여 있는 3・8선이라는 "물리적 경계"를 남과 북의 정치 지도자와 그 지도자들로부터 희생을 강요받아왔던 인민(국민)들 사이의 "심리적 경계"로 매우 설득력 있게 이동시켰다. 정작 우리가 경계해야 할 적은 3・8선 너머에 있는 북한이 아니라, 자신의 소신(자리? 이익?)을 지키기 위해 냉전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안기부의 민용준 차장(문성근) '같은' 사람이라고...

졸업식이 끝나고, 드라마의 쿠기에서 김두식(조인성)은 안기부의 민용준 차장을, 그리고 북한의 비행 능력자 정준화(양동근)는 북한 보위부장 김현성을 처단하며 그동안 자신의 왜곡된 소신을 위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켜 왔던 죄를 묻는다. 민용준을 처단하고 난 후 김두식은 낮게 중얼거린다.


우린 이제 쓸모가 없어.

 

이 대사를 통해 강풀은 지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벤져스식 영웅물과의 졸업을 선언한다. 더불어 집단을 위해 개인들의 희생을 요구해 왔던 전체주의의 탈을 쓴 집단주의와도…


<무빙>에서 찡했던 장면들…

어린 자식에게 무릎을 꿇고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아버지 재만(김성균)은 자식을 구하기 위해 전자발찌가 묶어 놓은 금기를 깨고 아들이 있는 정원고로 달려온다. 그리고 아들의 상처를 보고 폭주한다. 그동안 시간 맞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아버지를 무시해 왔던 아들 이강훈(김도훈)은 울먹이며 아버지가 여전히 바라고 있는 어리광을 부린다.

아버지, 또 떨어져 있기 싫어요.


나도 부모지만, 일반적으로 부모들은 자식의 성장 주기에 따라 필요한 대응 매뉴얼을 제때제때 업그레이드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자식을 뱃속에서 나온 여리고, 부족한 존재로 여긴다. 비행 능력을 들키지 않기 위해 엄마에게 업혀 지냈던 봉석은 부상을 입은 엄마를 업고 집으로 날아간다. 봉석에게 업히며 미현은 오랫동안 묵혀왔던 한 마디를 토해 낸다.

다 컸네, 우리 아들…


그 모습이 부러운 주원(류승룡)도 아빠를 부르며 달려오는 딸 희수를 보며 말한다.

우리 딸, 참 잘 컸네…


마지막으로 세 마디만 더...

영화로는 한 번도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던 강풀 원작의 웹툰이 <무빙>을 통해 마침내 대박을 터뜨렸다. 혹자는 강풀이 직접 각본에 참여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난 캐릭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강풀식 스토리텔링은 단편 영화보단 여러 편으로 이어지는 드라마에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지브리의 작품처럼 드라마가 끝난 후 펼쳐지는 행복한 일상 중에 봉석과 희수의 알콩달콩한 모습이 등장하지 않아 못내 아쉬웠다. 수미쌍관이라고... 봉석과 희수의 이야기로 시작했던 <무빙>이 마지막에도 봉석과 희수의 에피소드로 끝났으면 싶은 바람도...

마지막 장면에서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희수의 친구, 심달기(신혜원)가 마지막에 안기부의 고위직 요원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혹시... 시즌 2 떡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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