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사업의 민낯
2018년 은평구청 정책실장으로 있을 때 행안부 박모 서기관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은 적이 있었다. 박모 서기관은 행안부, 교육부, 그리고, 보건복지부가 함께 지자체를 대상으로 "온종일 돌봄 선도사업" 공모를 준비하고 있으니 은평이 꼬옥 참여해 달라고 부탁했다. '선도'는 뭐고, '공모'는 또 뭐란 말인가? 아마 간편하게 성과를 낼 수 있는 자치구로 은평구를 찍은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2018년은 문재인 정부가 막 출범한 다음이고, 민선 5, 6기를 이끌어 온 전국의 혁신적인 단체장들이 춘추전국시대처럼 웅거하던 시기였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러한 시대적 흐름을 타고 자치분권 개헌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결국 자치분권 개헌은 물 건너갔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에 썼던 글이 티스토리에 남아 있어 가지고 왔으니 한번 읽어 보기 바란다. 다시 읽어보니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난 행안부 서기관에게 은평은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도 잘할 수 있으니 차라리 어려운 지역을 찾아 공모가 아닌 지원을 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역제안을 했다. 그리고, 당시 혁신교육지구 지방정부 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금천구 차성수 구청장님께 자치분권의 흐름에 찬물은 끼얹는 교육부의 공모를 저지해 달라고 부탁하며, 이러한 중앙정부의 일방적인 공모는 보이콧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김상곤 교육부장관과 몇몇 구청장들이 만나 협의를 하기도 했었는데, 예산의 헤게모니를 지방에 빼앗기기 싫었던 중앙정부 관료들에 의해 공모는 별 차질없이 진행되었다. 만약 그때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이 교육부의 "온종일 돌봄 선도사업" 공모에 참여하지 않고 보이콧을 했었다면, 지금쯤 지방분권 개헌을 이루어 내지 않았을까?
내가 왜 이렇게까지 경쟁 방식의 공모에 경끼를 일으키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공모의 본질은 주체와 대상을 계급적으로 구분하는 선긋기이기 때문이다. 대단한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보이지만, 공모를 통해 이익을 보는 사람(집단?)은 멋도 모르고 공모에 뛰어들어 자랑스럽게 공모에 선발되는 참가자가 아니라 공모의 판을 까는 사람(집단)이다. 공모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지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공모를 주관하는 사람이 그어놓은 선을 넘어갈 수 없게 된다. 최근 <싱어게인3>을 열심히 보고 있는데, 심사위원보다 훨씬 더 음악성이 뛰어나 보이는 59호가 심사위원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취향'의 벽을 넘지 못해 탑 10 결정전에서 떨어지는 걸 보며 선발이 가지고 있는 허무함을 목도했다. 물론 이것도 내 취향일 뿐이지만...
자격증은 자격을 획득한 사람이 아니라, 그 자격을 결정하는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시스템이다. 대표적인 것이 학벌이라는 자격증이다. 입시 경쟁이 심해질수록 그 자격을 결정하는 대학의 위상은 올라가고, 학생들은 삶은 비참해진다. 과거보다 대학 정원은 몇 배나 더 늘었지만, 입시경쟁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대학에 서열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울에 있던 과거의 삼류 대학은 인서울이라는 날개를 달고 구름 위를 날아다니고 있다. 그 원인은 인서울 대학의 수준이 올라갔기 때문이 아니라, 대학을 가기 위해 과거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줄을 서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방에서 소멸해가고 있는 지방자치단체가 중앙정부의 공모사업에 열을 올릴수록 아이러니하게 지방소멸은 가속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우간다의 칼럼니스트인 '앤드류 음웬다'는 테드 강연에서 아프리카가 여전히 못 사는 이유는 신제국주의국가들의 "뉴마샬플랜"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서방국가의 선한(?) 원조는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을 원조에만 기대게 만들어 계속 가난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난 솔직히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지배를 포기한 후 보다 세련되게 자신의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 추진하기 시작한 마샬플랜과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사실 지방 정부도 아닌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공모가 어떻게 다른지 잘 모르겠다.
2014년 서울형 혁신교육지구 사업 설명회 때도 난 공모를 통해 서울의 25개 자치구 중 7개 자치구만 선정한다는 말을 듣고 경쟁으로 말아먹은 교육을 또다시 경쟁으로 해결하겠다는 거냐며 "ㅈㄹ"을 해 댔다. 결국 설시굑청에서 그럼 네가 와서 한번 해 보라고 해서 2년 2개월 14일 동안 혁신교육지구를 담당하는 어공으로 일하기도 했었는데, 내가 설시굑청에서 했던 일은 혁신교육지구를 7개에서 서울의 25개 모든 자치구로 확대한 것이었다. 심지어 난 지역에서 청소년 축제 심사를 맡으면 대놓고 모두에게 만점을 준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수준에서 시작에 얼마큼 노력해 성장했는지를 결과만을 보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앙하고 있는 ‘경쟁(competition)’이라는 단어는 ‘함께(com) 분투하다(petition)’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 ‘competrere’가 그 어원이다. 경쟁은 각자의 최선을 끌어내기 위해 인간이 고안한 최고의 신뢰기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쟁이 이상하게 대한민국과 만나기만 하면 목적을 잃은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지나친 경쟁은 협력해야 할 주체들을 분열시킨다. 나는 학창 시절 미대를 지망했을 정도로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의 미술 숙제를 대신해 주는 일이 많았는데, 정작 내 미술점수는 늘 별로였다. 지금으로 따지면 친구들의 수행평가를 대신해 준 셈이다. 그게 지금의 기준으로 과연 공정한 일이었는가를 차지하고 난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친구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유용하게 써먹었던 것 같다.
요즘은 수행평가를 통해 내신 등급을 결정한다. 한 번은 둘째 딸이 영어 시험을 보고 와서 짜증을 내길래 시험을 못 봤냐고 물었더니 시험이 너무 쉬워서 100점을 맞고도 2등급을 맞을 수도 있어서 짜증이 난다고 했다. 그럴 때 수행 평가는 100점을 맞은 아이들을 변별하는 기재가 되기도 한다. 며칠 뒤 학생 중 한 명이 수행평가 문제를 다른 반에 유출하는 바람에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먼저 수행 평가를 본 친구가 다른 반 친구에게 문제를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21세기 대한민국의 학교가 돌아가는 핵심 매커니즘이다. 경쟁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인 관계를 해체한다. 만약 과거의 나라면 친한 친구가 수행평가 문제를 물어보면 어떻게 했을까? 경쟁사회에는 지나친 공정도 관계에 해가 될 수 있다. 얼마 전부터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소위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지나친 경쟁과 기계적 공정이 만든 역설은 아닐까?
2017년인가? 온종일 돌봄에 이어 지방자치단체에서 추진해 왔던 혁신교육지구를 교육부가 지원하기 위해 풀뿌리 교육자치지구 공모를 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난 그 말을 듣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혁신교육지구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지방정부는 협의회를 결성해 여러 지역의 성과들을 공유하며 협력해 가고 있는데, 그 자치단체들을 대상으로 누구를 뽑을지 공모를 한다니... 당시 은평구청 정책실장이었던 난 혁신교육지구 관계자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는 혁신교육지구라는 파이를 어떻게 나눌지 논의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교육부에서 갑자기 자기도 파이를 줄 테니 줄을 서라고 하네요.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게 파이를 나누는 것일까요, 아니면 더 큰 파이를 얻기 위해 줄을 서는 것일까요?
현명한 은평혁신교육지구의 정책 참여자들은 과감하게 파이의 확대가 아닌 파이의 분배를 선택했다. 자치분권을 목놓아 외치던 전국의 자치단체장들은 대부분은 청와대로 기어들어갔고, 민선 7기에 그 빈 자리를 채운 새로운 자치단체장들은 자치분권보다 각자 더 큰 파이를 챙기기 위한 경쟁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민선 7기 지방선거 이후 첫 번째 열렸던 목민관 클럽에 참석했던 서울의 모구청장은 자기 지역에 아레난가 뭔가를 유치해 중앙정부로부터 몇 백억 대의 예산을 지원받기로 했다며 자랑을 했다. 이에 질세라 다른 자치구의 모구청장도 자기 지역도 중앙정부에서 얼마를 받기로 했다며 자랑을 이어갔다. 그때 수원의 염태영 시장이 지방분권 개헌을 이야기해야 하는 마당에 그게 지금 할 소리냐며 쓴소리를 던졌다.
경쟁은, 그리고 공모는 이렇게 우리 모두를 찌질하게 만든다. 그러니 미래교육지구 사업이 끝났다고 부디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2022년 말, 서울형혁신교육지구 예산이 전액 삭감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서울의 모 중학교 교장선생님이 나에게 했던 말처럼...
이제 제대로 된 혁신을 할 수 있겠네요.
2020년 공주와 부산 사하구 성장지원단에 참여했던 경험과 2023년 안양 미래교육지구 성장지원단에 참여하면서 느꼈던 소외를 풀어보겠다.
성과지표, 격차, 미래 등 지역소멸 외에 미래교육지구 성장 보고회에서 나왔던 다양한 키워드들을 내 식대로 짚어 볼 예정이다.
마음이 가는 대로,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