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말이 있다. 철학자 스피노자의 격언으로 알려져 있지만,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이라는 주장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의 말이라는 의견도 있다. 출처가 어찌 됐든 ‘현실이 아무리 암담할지라도 나는 내가 원하는 길을 가겠다’라는 선언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유명한 말을 내가 직접 실천하게 됐다.
수입 0원이라는 막막한 현실 속에서 생전 처음으로 꽃과 나무를 심었기 때문이다.
식목일이 다가와서가 아니다. 시작은 길고양이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내가 사는 집 인근에 길고양이들이 겨울을 나는 집과 사료집을 만들어 두었다. 그런데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일부 견주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우리 강아지가 고양이를 좋아한다’라며 강아지를 집, 사료집 가까이 데리고 온다. 길고양이가 집에서 쉬거나 밥을 먹다가도 강아지가 나타나는 바람에 깜짝 놀라 황급히 도망가기 일쑤였다. 강아지는 움직이는 동물을 보니 흥분해서 따라가려 하고, 일부 견주들은 ‘강아지가 좋아한다’라며 방치하거나 오히려 길고양이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이 과정에서 우리 집 바로 앞까지 다가와 사생활 침해도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강아지가 고양이를 좋아해서 쫓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런 게 아니라는 점을 일부 견주들이 이해해줬으면 한다. 중형견 이상의 개는 길고양이를 얼마든지 공격해 죽이거나 상해를 입힐 수 있다. 실제로 개가 좋아한다며 길고양이를 물어 죽이는 걸 보고만 있거나 길고양이를 공격하라고 목줄 없이 개를 풀어놓는 견주도 있다. 자신의 반려견만큼 길고양이도 똑같이 소중한 생명임을 부디 제발 인식해주기를 바란다. 나 역시 고양이를 내 가족처럼 여기지만 강아지든 고양이든 일단 공격 본능이 있는 동물이다. ‘내 강아지가 고양이를 좋아한다'라며 길고양이에게 위협이 되는 행동은 제발 금해주기를 빈다.)
내 눈앞에서 길고양이가 도망갈 곳을 못 찾아 기겁하는 것을 본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견주가 우리 집으로 산책을 못 오게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겠으나, 서로 싸우지 않고 장기적으로 길고양이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 결과 아예 길고양이 집 주변을 화단으로 만들어 사람들의 접근을 막아보자, 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처음으로 꽃씨와 모종삽을 샀다. 땅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있는 힘껏 땅을 파기 시작했다.
백일홍, 해바라기, 메리골드, 코스모스, 꽃양귀비 등 늦어도 여름에는 꽃을 피우는 꽃들을 먼저 심었다.
나무는 무엇을 심을까 고민하다가 처음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버린 ‘자엽안개나무’(royal purple, smoke tree, smoke bush 등으로 불림)을 심기로 했다.
보랏빛 잎사귀를 지닌 자엽안개나무는 매년 봄, 안개처럼 뿌연 꽃을 피운다. 사실 나는 벚꽃, 목련, 매화처럼 색과 모양이 뚜렷한 꽃나무를 좋아했다. 그러나 보라색 안개가 낀 듯 나무 전체를 은은하고 신비롭게 감싸는 자엽안개나무꽃을 보니, 나의 뿌연 인생이 이 꽃과 닮았다는 생각과 그럼에도 이토록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도 있겠다는 벅찬 감동이 나를 감쌌다.
자엽안개나무는 크게는 3~4미터까지 자라며 5~7월경에 꽃을 피우고 가을에는 노란 단풍이 물든다고 한다. 살면서 수십 번의 식목일을 겪었지만 단 한 번도 나무를 심어본 적이 없었던 나. 그러나 길고양이를 지키겠다는 마음과 나무가 주는 긍정의 기운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묘목을 구입한 후 모종삽으로 열심히 땅을 팠다. 평소 운동이라고는 조금도 안 하는 내가 격렬한 노동을 하니 두 팔과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땅을 파고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을수록, 메마른 땅에 물을 부은 것처럼 내 몸에 활력이 생기고 자연에 대한 애정이 싹트는 게 아닌가. 나를 불쾌하게 만든 견주를 잊어버릴 만큼 땅과 나무, 꽃이 주는 힘은 강력했다.
부디 잘 자라주어 네가 가진 모든 아름다움을 활짝 피어내길 바라.
강아지를 피하느라 기겁을 했던 길고양이들도 어느덧 내 옆에 예쁘게 앉아 내가 나무를 심는 모습을 함께 지켜봐 주었다. 자엽안개나무 3주를 심었는데 각각 ‘빙빙, 미미, 양말’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빙빙, 양말이는 내가 구조한 길고양이고 미미는 현재 생사를 알 수 없지만 세상에 무심했던 나를 캣맘으로 만들어준 나의 영원한 첫 번째 고양이다.
화단 한 편은 길고양이들이 좋아하는 ‘귀리’를 심어 언제든 질겅질겅 씹어 먹을 수 있게 할 계획이다. 라벤더, 봉선화, 카모마일 등 또 다른 꽃들이 땅의 기운과 내 마음을 양분 삼아 쑥쑥 자라게 할 생각이다.
코로나19로 인한 수입 0원인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지만, 나는 한창 돈을 벌 때도 하지 않던 꽃, 나무 심기에 모아놓은 돈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이 꽃과 나무들이 건강하게 자라 조금이라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더불어 길고양이들도 지켜줄 수 있다면 무엇보다 가치 있는 지출을 했다고 생각한다.
빙빙, 미미, 양말 나무가 잘 자라 꽃을 피우기 위해선 적어도 1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비록 내일 지구가 멸망할 지라도, 내가 직접 사랑으로 심은 이 생명들이 잘 자라도록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