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살, 나는 자라지 못했습니다
1.
“어두운 세상에 밝은 빛을 비추는 가치 있는 사람으로 자라거라.”
40년 전 어느 날 밤, 평범했던 젊은 부부는 유일한 자식이자 귀여운 딸이 태어나자 이름을 ‘김빛나’라고 지었습니다. 여느 부부들이 그렇듯 가장 뜻깊은 의미를 담아 딸의 이름을 지었지요.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후, 올해 마흔이 된 김빛나 씨는 ‘어린이방 아줌마’가 되었습니다. 늘 그랬듯 느지막이 일어나 멍하니 스마트폰을 보며 시간을 보내던 김빛나 씨는 눈에 띄는 기사 하나를 클릭했습니다. 요즘 일본에서는 ‘결혼도 하지 않고 번듯한 직장도 없으며, 부모에게서 독립하지 않고 함께 살고 자신의 방에서 취미 생활을 즐기는 나이 든 자식들을 ‘어린이방 아저씨’라고 부른다’라는 내용이 해당 기사의 골자였습니다. 엄지손가락으로 무기력하게 화면을 내려다보는 김빛나 씨는 ‘피식’하고 웃으며 생각했습니다.
“뭐야, 나잖아.”
다른 사람의 삶에는 신경 쓰지 않는 것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교양이자 예의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무심하고 냉소적인 태도에 은근히 자부심을 느꼈던 김빛나 씨. 하지만 마흔이라는 나이는 이제껏 지나왔던 나이와는 다른 무게감을 주었습니다. 그저 한 살 더 먹었네,라는 느낌이 아니라 ‘나 이제 어떡하지. 절벽에서 이미 떨어지고 있는 기분이야’라는 공포로 다가왔지요.
하지만 이런 내면의 두려움과는 달리 외면의 일상은 누구보다도 평온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김빛나 씨는 말하자면 ‘비정규 임시 자유직 아르바이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별다른 재능이 있지도 않고 돈이 될 만한 기술을 습득하지도 않았던 김빛나 씨는 4대 보험에 가입해 주고 정기적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에 취업을 할 수 없었죠. 안정적인 직장을 얻지 못했던 데에는 김빛나 개인의 능력이 부족해서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김빛나 씨는 내심 조직문화가 자신에 잘 맞지 않다고 생각해 적극적인 구직 활동을 하지 않았기도 했지요.
그 결과, 김빛나 씨는 부모님의 지인 중 편의점을 운영하는 분이 급하게 일손이 필요할 때 잠시 카운터를 맡아주거나 행사 진행 보조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럭저럭 자신이 쓸 생활비 정도는 벌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다지 물욕이 있지도 않고 필요한 것만 있으면 된다,라는 생활 태도 덕분에 수입은 적어도 저축까지 할 수 있었죠.
“빛나야, 너 뭐 하니. 밥 안 먹나?”
이른 아침부터 밥을 짓고 국을 끓여 밥상을 차린 어머니가 나이 먹은 딸을 불렀습니다. ‘김빛나’라는 소중한 딸을 품에 안았던 젊은 엄마는 어느새 일흔이 넘는 노모가 되어있었습니다. 통역사가 되어 전 세계를 누비는 삶을 꿈꿨던 어머니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 꿈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일평생 작은 슈퍼마켓을 운영하며 어디로도 떠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냈지요.
자신의 못다 한 꿈을 딸이 멋지게 이루어주길 바랐지만 딸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의욕, 열정, 희망 같은 단어는 지우고 자신의 방 안에 주저앉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딸이 좀 더 힘을 내어 혈기왕성하게 살고 돈도 많이 벌기를 바랐던 어머니였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며 무섭게 젖어드는 외로움은 딸이 이제 어디로든 떠나지 않고 같은 집에서 함께 살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뀌었지요. 어머니가 마흔이 된 김빛나 씨가 독립을 하지 않아도 아무런 불만이 없는 이유였습니다.
어머니의 부름을 받은 김빛나 씨는 누워있던 자세를 고쳐 바르게 앉았습니다. 시계는 오전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이 시각에는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지요. 하지만 직장이 없는 김빛나 씨는 업무에 대한 압박이나 초조함보다는 권태를 느꼈습니다. 그녀는 책장에 팔을 뻗어 오래된 노트들을 모두 꺼내 바닥에 늘어놓았습니다. 일기장이었죠. 어렸을 때부터 종이에 펜이 쓱쓱 지나가는 느낌과 소리가 좋았던 김빛나 씨는 일기만큼은 꾸준히 써오고 있었는데요. 자신이 ‘어린이방 아줌마’가 됐구나,라는 순간의 깨달음은 김빛나 씨의 지난 40년간의 인생이 얼마나 ‘빛나’며 흘러갔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습니다. 불현듯 찾아오는 공허함에 김빛나 씨는 허기도 사라져 버렸지요.
“뭐 하니? 밥 안 먹나?”
“나중에 먹을게. 엄마 먼저 먹어.”
기껏 차린 밥상을 거르는 딸에게 어머니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게 여전히 애 같다’라고 잠시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내 품 안의 자식이라는 느낌이 들어 화는 금세 풀렸지요.
하지만 김빛나 씨의 공허함은 금세 가시질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이 ‘김빛나’처럼 의미가 있었는지를 확인해야만 했지요. 어느새 수십 권이 된 일기장 중 가장 먼저 손에 잡히는 일기장을 집었습니다. 먼지가 쌓이고 좀 이 지나간 오래된 노트를 펼치니 잊었던 기억이 흘러나왔습니다.
때는 20년여 전, 김빛나 씨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