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 겪고 한잔 했습니다
며칠 전 일이다. 개와 산책을 하다가 낡은 사륜 구동 트럭에 앉아서 나와 개를 유심히 살펴보는 백인 남성을 마주쳤다. 이놈의 개는 빨리 가자는 나의 재촉에는 아랑곳 안 하고 트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떡허니 자리를 잡고 긴 가래떡 응가를 하기 시작한다.
잽싸게 비닐봉지를 꺼내서 치우고 나니, 그 남자는 차에서 내려서 나에게 다가온다.
나는 헤드폰을 그대로 쓴 채 웃으면서 '헬로우!'라고 인사를 건넸다.
그 남성은 내 앞 1미터 정도 앞에 서서 손을 허리춤에 올리고 한숨부터 쉰다.
밝은 낮이었지만 주변에 사람들은 없었다. 그래도 외국에서 오래 산 사람으로서 이런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을 나는 잘 안다. 이렇게 위협적인 포즈로 다가오는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여서는 안 된다. 나는 자신 있게 더 큰 미소를 얼굴에 머금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냥 가던 길을 가려했다.
그 남성이 길가는 사람을 세우고 하고자 하는 말은 뭐.. 골자는 없다. 그냥 무조건 시비를 거는 거다.
내가 별로 대응을 하지 않자 그는 최후의 마지막 한 마디를 던진다.
너 중국 사람이지? 중국으로 돌아가.
호주, 캐나다와 미국등 여러 나라를 살면서 내가 가장 흔하게 듣는 인종차별적인 말이다. 특히 백인들이 이런 식의 비하 섞인 말을 한다. 이런 말을 듣고 나면 나는 상대방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최후통첩'정도로 생각하고 무시를 한다. 더 이상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나의 의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시애틀로 1년 전쯤 이사를 오고 처음으로 당한 일. 실리콘밸리에 살 때도 몇 번 정도 들었는데 보통은 정신이 나간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약이나 술에 취한 사람들이었는데 이렇게 나름대로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들은 것은 참 오랜만이다.
요즘 미국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것은 다들 잘 알고 계실 것이다.
몇 달 전에 애틀랜타에서 수갑을 채워서 이민자 수용소로 우리 일꾼들을 강제 연행한 일을 보면서 마음이 좋지 않았는데 정말 요즘은 미국에서 유색인종으로 사는 것이 두렵고 서러운 기분이 드는 때가 종종 있다.
세상이 좋게 돌아갈 때는 인종차별은 시골구석에서나 있는 나이 많은 백인들 아니면 정말 몰지각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요즘 미국 이민성 콜센터는 미국인들의 불법 이민자 신고 전화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을 정도란다.
평소에 꼴보기 싫었던 옆집에 살고 있는 동양인 부부, 팁 제대로 안 주고 내린 짠내 나는 인도사람. 불법이든 아니든 맘에 안 들면 우선 이민성에 신고부터 한다. 재수 없으면 정부 청사로 연행, 하루 이틀 콩밥 먹이고 신분이 밝혀지면 집으로 돌려보내고 아니면.. 어딘가로 사라진다는 요즘 이민자들끼리 주고받는 공포소설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의사, 간호사, 과학자들 오라고 오라고 해서 왔더니 이제 와서 백인 아니라고 여기저기서 손가락질에 두려움에 떨면서 집과 회사만 오간다는 사람들이 많다
이미 다른 나라행을 택하거나 내년에 회사에서 2억 정도가 되는 비자 수수료를 내줄 것인가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에 들어간 이들도 많다. 설마 정말 2억이나 내놓으라고 할까? 국감이나 대법원에서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나게 놔둘까?
실리콘밸리에서 수억 원씩 받고 다니는 사람들은 괜찮겠지. 또는 의사나 과학자들은 아마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여기엔 많다. 실제로도 이런 사람들은 유색인이라도 어느 정도 보호를 받는 면도 있다.
"나는 괜찮아. 너는 괜찮을 거야."
그러나 너와 나만 괜찮은 건 정말 괜찮은 게 아니다.
우리만 괜찮다고 괜찮은 게 아니다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이 아프면 우리도 아파진다. 그냥 감정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게 사회의 이치다.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이런 반 이민주의감정이 대세다. 아프리카는 몇 백 년 동안이나 유럽의 통치아래 가진 거 다 뺏기고 허깨비 정부를 세워놓고 사람들은 노예로 팔아 놓고는 이제 와서 흑인들이 유럽을 다 망친단다.
캐나다에 사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봐도 인도 사람들이 캐나다 다 망친다고 난리다.
나도 캐나다에서 살아봐서 안다. 캐나다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인도 사람들이 아니라 과열된 부동산 투자와 정부의 무능력한 정책 때문이다.
그러나 공공의 적을 만들어야 우리의 힘이 커지고, 공공의 적을 만들어야 단합할 수 있다.
인간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역사에서 수없이 우리는 이런 현상을 봤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역사를 되풀이한다.
최근 미국에서는 B형 간염 예방 접종 관련 중요한 논쟁이 있는데, 특히 CDC 예방접종자문위원회(ACIP)가 신생아 B형 간염 백신 접종 권고를 폐기하자는 논의로 떠들썩했다.
'부자인 나와 배운 너의 자식은 백신 맞으면 되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너랑 내 자식이 면역손상자나 면역력 약화인이면 어쩌려고?
우리 엄마가 암치료를 받고 있거나 우리 아빠가 병원에서 교통사고 치료를 받고 계시면?
다른 사람들이 백신접종 안 하고 병에 걸리면 이런 약한 이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
돈이 많아도 피해 갈 수 없고 서울대나 하버드 나와도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세계가 백신접종을 시작한 거다.
너랑 나랑 잘 살려면 모두가 잘 살아야 해서.
이민자는 이곳에서 태어나지 않아서 조금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어쩔 수 없다.
성소수자가 얼마나 된다고.. 그들의 권리는 나중에 생각해 보자.
이렇게 선을 그다가 보면
여성의 권리도, 아이들의 권리도,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의 권리도 굿바이다.
한국에서는 5천 원짜리 케이크를 편의점에서 사 먹든가 50만 원짜리 케이크를 호텔에서 사 먹는다고 하더라.
50만 원짜리 케이크를 사서 인스타에 올리고 사람들이 막 좋다고 해주면
케이크맛이 얼마나 좋을 거 같으냐?
난 별로 일거 같다.
혼자 전망 좋은 비싼 아파트에서 무드 있는 음악 틀고 케이크 한 조각 입에 넣으면
왠지 씁쓸할 거 같아.